52nd 봐옐레크

ויֵלֶךְ

그리고 그가 갔다

파라샤 Deuteronomy (신) 31:1-30

하프타라 Isaiah (사) 55:6-56:8 / Hosea (호) 14:2-9 / Joel (욜) 2:15-27 / Micah (미) 7:18-20

브리트 하다샤 Romans (롬) 10:1-17 / Matthew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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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도자와 기록된 토라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갱신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한 모세는 이제 자신의 사명과 삶을 마무리할 준비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첫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정복 전쟁의 과업을 완수할 새로운 지도자의 임명과 둘째는 그 땅에 들어가서 태어나는 새로운 세대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말씀이 잘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가르침(토라)의 말씀들을 다 기록하여 책으로 전해주는 일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지도력을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이양합니다(신 31:7). 출이집트에서 광야생활까지 모세의 지도력을 따랐던 백성들이 모세의 부재로 인해 내부적인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 또 잠시의 빈틈이 외부의 공격의 빌미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세는 자신의 모든 권위를 여호수아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당부합니다(신 31:6-8, 23). 하나님은 그들이 강하고 담대해야 할 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요단을 건넌 이후 그들이 치러야 할 전쟁들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케 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들이 만만치 않겠지만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셔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가나안 민족들을 멸하실 것과 요단 동편의 강한 두 나라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일을 떠올리게 하시며 그와 같이 가나안의 민족들이 파멸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신 31:3-4). 이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빼앗겼던 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 하나님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신 약속을 믿고 그들은 담대함으로 그 땅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시나이 산의 언약과 모압 평지의 언약을 잊지 않고 실행하기 위해, 또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잊지 않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율법의 말씀을 다 기록하여 제사장들과 모든 장로에게 주고 매 칠 년 초막절에 택하신 그곳에 모여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이 듣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 31:9-11). 온 이스라엘에는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 그리고 그들의 땅에 거류하는 타국인이 포함됩니다(신 31:12). 이로써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은 먼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킹덤을 시작하는 이스라엘과 그들과 함께 하는 타국인들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주어졌음을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의 말씀, 토라는 모든 열방을 향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안에 들어온 모두가 하늘의 가르침인 토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신부로 세워져 갑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토라)을 받은 우리는 말씀을 우리의 삶에서 떠나지 않게 묵상하고 반복하여 읽고 듣고 낭독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가게 함으로써 하늘의 유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 땅에 계속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 가르침(토라)의 말씀이 세대 간의 전수에서 실패하면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앞 세대에 주신 것들을 다음 세대는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킹덤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길, 원수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빼앗기지 않는 길은 이 가르침(토라)의 말씀들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입니다. 토라에는 구원의 역사가 담겨 있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성화되는 삶의 지침들이 담겨 있으며 마지막 구원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넘어가는 세대 교체 가운데 하나님이 당부하신 두 가지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을 기록하여 가르치고 낭독하라’는 마지막 세대를 거룩한 세대로 일으켜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영적 전쟁에 들어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때 부어지는 늦은 비의 강력한 성령과 새로운 영적 권위(기름부음)가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름부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땅을 야라쉬ירש 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의 풍부함과 아름다움, 건강과 축복 대신 사탄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가난과 질병, 무질서와 폭력을 끊어 버리고 우리는 다시 야라쉬ירש 할 것입니다.예슈아는 우리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셨는데 땅에 돌이나 가시덤불처럼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고 땅이 잘 경작되어 있는 만큼 그 땅은 비를 잘 흡수하여 씨앗이 잘 자라게 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인 토라를 하아지누הַאֲזִִינו, 귀 기울이고 또 기울여 들은 뒤 땅에서 티쉬마תִשְמַע,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흐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끊임없이 쉽게 망각하는 자신의 백성을 향해 들으라, 순종하라를 반복적으로 외칩니다. 결국 귀 기울여 듣고 들음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이 완성될 것입니다(롬 10:17).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메슈바מְשוּבָה에서 테슈바תְשוּבָה로

엘룰 월 1일부터 대속죄일까지 40일의 시간은 테슈바תְשוּבָָה의 기간으로 보내는데 그 뜻은 돌이키는 기간 즉, 회개의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 새해가 시작되는 로쉬 하샤나(나팔절)부터 욤 키푸르(대속죄일)까지 10일의 시간은 경외의 날들(야밈 노라임יִָמִים נֺורָאים)이라 불립니다. 회개의 40일의 기간 중에서도 더 깊은 회개의 시간을 보내는 가장 거룩한 기간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을 고백할 뿐 아니라 경외의 날들 10일 동안에는 형제와 이웃을 찾아가 실제적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하는 적극적인 회개의 시간으로 보냅니다. 죄악을 고백하는 시간은 어찌 보면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가 드러나는 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죄로부터 분리되고 자유케 함으로 우리의 거룩을 회복하게 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거룩한 회개의 시간을 지내는 경외의 시간을 지나는 주간에 있는 샤밭은 샤밭 슈바שׁבָּת ׁשוּבָָה라고 하며, 그 뜻은 회개의 샤밭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52주간 봐옐레크는 나팔절과 대속죄일 사이의 주간이며 샤밭 슈바의 토라 포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음란히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불의와 죄악으로 인해 엎드러진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돌아오라(슈바שוּבָָה)고 외치십니다(호 14:1). 그런데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드바림) 가지고 돌아와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받아 주시길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호 14:2). 그리고 앗수르나 말(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신이라 말하지 않으며 고아가 하나님으로 인해 긍휼을 얻었다고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호 14:3).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오라는 것은 하나님보다 높아져 있는 생각과 기준과 행동을 버리고 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기준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없고 바른 회개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가 기준이 되었던 것을 버리고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가지고 오라는 것은 형식적이며 종교적인 예배가 아닌 마음의 진실과 사랑을 담은 입술의 고백과 언행일치의 삶을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와 말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의 힘과 정치력과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말씀이 없음으로 버려져 고아 같았던 이들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자비와 긍휼 가운데 다시 태어났음을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겠다고 결단하십니다(호 14:4). 반역이라는 히브리어 메슈바מְשוּבָָה는 ‘돌아오다’는 히브리어 슈브שוּב에서 파생된 단어로 슈바와 같이 ‘돌아옴’이라는 뜻의 명사이지만 혼돈을 의미하는 멤מ이 앞에 붙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돌이킴, 혼돈을 향해 돌이킴’을 의미하며 ‘배교, 배신, 나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상에게로 돌이켜 배교하고 배신하고 나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곧 패역함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키는 테슈바תְשוּבָָה는 슈바שוּבָָה 앞에 언약을 의미하는 타브ת가 앞에 붙어서 ‘언약을 붙들고 기억하여 언약을 향해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돌이킨 방향이 잘못되어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에게로 갈 때 그것은 반역이지만 그 반역에서 돌이켜 언약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슈브שוּב할 때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과 기쁘게 사랑을 나누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던 하나님의 진노도 방향을 돌이키게(슈브) 됩니다. 패역 즉, 반역하는 병이 고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며 이 반역하는 질병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고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다시 사랑의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백합화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굳건히 뿌리가 박혀 다시 풍성과 번영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호 14:5-7).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반역을 고쳐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고 하나님과 기쁘게 사랑을 누리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선악과의 열매로 인한 자기 기준의 교만한 잣대를 버리고 진실한 예배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메슈바מְשוּבָָה에서 테슈바תְשוּבָָה로” 이것이 슈바שוּבָָה, 진정한 회개입니다.

요엘서에서는 마지막 날에 열국의 군대들이 모여 이스라엘 산지를 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려 할 때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 성회를 선고하고 모여서 회개하게 되고(욜 2:17) 그 위기의 때 이른 비가 내리면서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며(욜 2:23, 28-29)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미가서에서는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고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심으로 인애와 성실을 더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미7:18-20).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회복과 사랑, 그리고 거룩한 영입니다. 호세아와 요엘은 모두 마지막 때 예슈아의 재림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의 관점으로 요엘은 남유다의 관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의 뜻은 ‘하나님께서 나로 나의 고난의 땅에서 열매맺게 하셨다’(창 41:52)는 뜻입니다. 에브라임אֶפְְרַיִם은 파라פרה(열매 맺다)라는 뜻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단어가 히필동사 히프라הפרה라고 쓰이면 이것은 ‘열매를 맺게 하다’, ‘식물을 수정시키다’는 뜻을 가지면서 동시에 ‘접붙이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48:19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아우가 형보다 크게 되며 여러 민족을 이루겠다고 축복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민족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멜로 하고임מְלֹא הַגוִֹיִם’입니다. 이 말은 로마서 11:25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같은 단어입니다. 열방으로 흩어져 흡수된 에브라임은 이방 세계로 접붙여져서 하나가 되었고,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아 이방인의 충만한 수(멜로 하고임מְלֹא הַגוִֹיִם)가 차게 되는 목표를 에브라임을 통해서 예비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을 통해 온 땅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7 마지막 때에는 그 동안 열방으로 흩어진 북이스라엘, 에브라임 나무와 유다 나무가 서로 접붙여져서 결국 유다와 에브라임,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40일의 테슈바תּׁשוּבָָה(회개)의 기간 중 앞의 30일에 드리는 기도의 기도문에는 이방인들(고임גוִֹיִם)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포함된 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외의 날들(야밈 노라임) 10일 동안은 자신들과 함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의 심판과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수천 년간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온 백성입니다. 창세기 48:19에서 계시된 야곱의 에브라임에 대한 예언을 통해 멜로 하고임מְלֹא הַגוִֹיִם,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열방이 함께 왕국의 유업을 받게되는 이 계획의 성취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어 온 유대인들이 그 메시아가 예슈아이심을 알게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들을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의 때가 차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예슈아를 거절하고 있는 이들의 가려진 눈과 귀가 이제 열려지도록 축복해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함께 온전하게 차게 될 그 날,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한 새 사람을 이루게 될 그 날이 이제 곧 오게 됩니다.

כל ישראל יושע

콜 이스라엘 이봐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

율법(토라)의 마침 예슈아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과 부르심에 충성되이 살았고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야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도 분명히 알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항상 자기 민족을 향한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지만 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의가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을 지적하였습니다(롬 10:2-3).

유대인들은 말씀을 맡은 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받은 자로서의 특권 의식을 가지고 그들 특유의 뒤쫓아 가서 꽉 붙들고 놓지 않는 야곱의 DNA로 토라를 붙들어 왔지만, 토라를 붙들고 행함에 있어 자기들의 의가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지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기 의의 치명적 결함은 그들이 토라에 기록된 메시아를 알려주고 있는 수많은 말씀들과 뜻을 알면서도 그 메시아가 예슈아라는 것은 결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감춰둔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 때가 열렸음에도 오랫동안 고착되어 왔던 그들의 전통과 방법은 그들의 마음을 여전히 완악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슈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말합니다(롬 10:4). 우리의 입으로 예슈아가 주이신 것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0:9-10).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욜 2:32, 롬 10:13).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토라에서 나옵니다(롬 10:17). 유대인들은 이제 예슈아의 이름을 듣고 시인해야 할 때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슈아의 이름을 들을 수 있도록 선포하고 전하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추수 들판에 추수의 일꾼을 보내주시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예슈아의 이름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과 교회가 하나되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헌신하는 자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말씀하시며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토라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본질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베드로는 토라의 본질인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지킴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형제가 잘못한 것을 비판하지 않고, 또 나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이 말은 숫자적으로 490번까지 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형제를 항상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부터 큰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적은 빚을 진 친구의 빚은 탕감해주지 않고 함부로 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아버지가 너희를 용서해 준 것처럼 너희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물질적, 정신적 피해가 크면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한없이 당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볼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나를 향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토라가 명하는 형제 사랑의 방법에는 용서가 중요한 부분임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토라의 가르침을 확장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됩니다(요일 4:20). 토라를 지켜 행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나를 묶고 있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회개하고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용서를 행해야 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긍휼을 구하며 용서의 마음을 주시길 간구할 때, 자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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