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th 드바림

דְבִָרִים

말씀들

파라샤 Deuteronomy (신) 1:1-3:22

하프타라 Isaiah (사) 1:1-27

브리트 하다샤 Acts (행) 7:51-8:4 / Matthew (마) 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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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서서

이집트에서 나온 지 마흔째 해, 열한째 달 첫째 날(쉐밭 월 1일)에 약속의 땅이 보이는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섭니다(신 1:3). 모압 평지는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입니다. 이 경계는 약속을 향하여 가는 과정과 약속이 완전히 이뤄지는 사이의 경계이며, 오랜 시간 헤매었던 방랑을 끝내고 안정된 정착의 삶으로 들어가는 경계이고,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경계이자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림 속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자들에게 약속이 실체 가 되어 눈 앞에 나타나 있는 곳, 그 곳이 모압 평지였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그 곳에 서서 요단 서편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모세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한 번 더 율법(토라)을 선포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신 1:1, 5).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겪어 왔던 과거의 수많은 사건들과 이제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경계에서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명백히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시는 능력이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법과 통치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며 세상의 영향력과 통치, 세상의 법에 좌우되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이집트(세상)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음으로 이집트적인(세상적인) 생각과 감정,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뤄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한 생각과 감정,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율법(토라)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삶의 기준과 방향성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을 잃어버리면 각자의 기준과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혼란과 무질서가 따르고 혼란과 무질서는 곧 파괴와 파멸을 불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때를 벗지 못해 광야에서 지난한 훈련과 연단의 시간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서서 강조하고 당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드바림 דבִָרִיְם)과 율법(토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땅은 하나님이 택하신 땅이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함께 친히 그 땅을 다스릴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법과 통치 아래 다스려져야 했기에 그 땅에 들어가 살도록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인 말씀과 율법을 어느 민족보다도 잘 알고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치의 근본인 말씀과 율법을 따르는 삶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인류 역사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이 시즌은 세상 통치가 마무리되고 하나님의 킹덤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에 세상과 하나님의 킹덤의 경계에 서 있는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붙들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과 율법(토라)을 선포했던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그것을 따라 살 것을 결정하도록 교회와 성도를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기준이 너무 제각각이면서 또 명확하지 않는 시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학문의 권위 아래에 두고 경시하며 세상 학문의 기준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그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너무 다르게 해석되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말씀 아래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기준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을 붙드는 힘입니다. 지금 이 시간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법대로 온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드바림, 사람의 드바림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가 있었고 사람은 항상 두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두 나무를 바라보면서 선택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본주의 삶의 스타일을,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사탄의 그럴싸한 제안 즉, 인본주의 삶의 스타일을 의미합니다.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던 이 두 가지 사이의 선택은 첫 창조에 속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고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선택할 것이냐,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하고 따라갈 것이냐의 선택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두 나무(두 킹덤) 사이에서 어떤 나무(킹덤)를 선택할 것인가는 하와와 아담에게만 주어졌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내내 모든 인간의 매일의 삶 앞에 놓여왔던 문제입니다. 인류가 가장 치열하게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시대는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과 새하늘과 새땅의 시작과 함께 영원 세계가 시작 되기 직전에 있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드바림 דבִָרִיְם)을 선포하고 가르쳐 주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인본주의적인 말소리(드바림 דבִָרִיְם)를 내고 따르기 시작했을 때 어떤 실패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신 1:34).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 산(시나이 산)에서 언약을 받고 떠나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 이릅니다(신 1:19).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저하지 말고 약속한 땅을 차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에게 먼저 사람을 보내어 정탐할 것을 제안하고 모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들은 그 땅의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신 1:2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신 땅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신 1:27)’ 라고 말하며 그 땅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드바림)과 사람들의 말소리(드바림) 사이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따라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사람의 말소리를 따른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규정하시며(신 1:35) 그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그리고 그들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무시했던 그들의 자녀 세대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드바림)을 선택하지 않고 사람의 말소리(드바림)를 선택한 자들의 결과는 생명과 풍성함이 아닌 사망과 단절입니다.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 백성이 낸 말소리는 모두 히브리어로 드바림이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드바림דבִָרִיְם은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다바르דבִר에서 파생된 복수 명사로 ‘말들’이라는 뜻입니다. 말은 곧 영입니다(요 6:63).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영이 전달되고 그 영이 어떤 영인가에 따라 생명이 흘러가게 할 수도 있고 사망이 흘러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드바림)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악한 것을 잘라내는 생명을 살리는 영이지만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말(드바림)은 그럴듯하게 들릴 뿐 사실은 어지럽게 하고 생명과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망의 영(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은 바른 판단과 결정(미쉬파트משְׁפט)을 하게 하지만 사람의 말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낙심케 합니다.

모세가 정탐을 보낸 12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지혜와 분별력이 있고 경험이 있는 우두 머리들이었습니다(신 1:13).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드바림이 아닌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생각을 따라갔고 이 생각은 사람의 드바림을 내뱉게 하였으며 사람의 드바림은 전염병처럼 두려움과 낙심을 퍼뜨려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세는 강하고 확신있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가르치며 안심시키고 설득하였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0-31)

모세는 미숙하고 어려서 쉽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어린 아들을 아버지가 품에 안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안고 가시는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어린 아들이 모든 것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강한 아버지이자 아들을 위해 강한 사랑과 보호로 품고 있는 따뜻한 아버지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지식과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사람의 말소리를 내게 된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로서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 있지 않으면 바른 판단과 결정(미쉬 파트משְׁפט)을 내릴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바르게 미쉬파트 할 수 있는 것은 우주 만물의 기준과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하늘 아버지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방랑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그들이 사람의 말소리를 따랐던 것을 지적하였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토라)으로 그들을 가르치며 준비시켜 주었습니다.

예슈아의 다시 오심과 천년 왕국을 눈 앞에서 가까이 바라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채우고 진리를 붙들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역사 가운데 왜곡되고 가려졌던 진리의 말씀을 다시 묻고 들여다보고 깨달으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고 하는 학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사람의 말소리들, 철학과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잘못된 신학들을 걸러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읽고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할 뿐 말씀을 사랑함으로 묵상하고 상고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을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킹덤 사이의 경계에 서서 우리가 붙들고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엑기스와 본질인(넓은 의미에서의) 토라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토라)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토라)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말씀과 핍박, 그리고 부흥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양육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행위가 부패한 자식으로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기고 버렸습니다(사 1:2-4).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매를 드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매를 들어도 고침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행 7:51). 스데반은 그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행 7:53). 목이 곧은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을,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은 불필요하고 악한 것을 잘라내지 않은 허물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상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은 늘 성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책망에 종교의 영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이를 갈았지만 진리의 말씀을 전한 스데반에게는 하늘이 열리고 그는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슈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행 7:55). 하늘이 열린 것을 바라보는 스데반을 향해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칩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한 사람은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살기로 충만하여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인 명분을 앞세워 사람을 돌로 쳐서 죽게 하였습니 다.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 스데반은 ‘아도나이 예슈아יהוה ישוע’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외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들어 칠 때 증인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던지고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행 7:58, 8:1).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자부했지만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종교를 따른 이들은 오히려 성령과 말씀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종교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가인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를 올려드린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을 연상케 합니다. 마지막 때인 지금은 종교의 영과 진리의 말씀이 극명하게 나뉘고 있습니다. 종교의 영에 가득 찬 이들은 진리를 말하는 이들을 미워할 것이지만 진리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더 열리면서 하늘의 영광과 예슈아를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의 품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소돔의 관원들 같고 고모라의 백성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 토라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짓 제사, 가식적인 제사를 드리면서 월삭, 안식일, 정한 절기에 모이는 것을 보고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사 1:15).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며 동물들의 피를 흘렸지만 그 예배는 마음으로 올려드리는 예배가 아닌 종교적 형식과 자기들의 의로 가득 찬 예배였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와 절기의 모임들을 싫어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1:14). 그들이 이렇게 가식적이며 위선이 가득한 예배로 하나님을 기만하게 된 이유는 그들 안에 의(쩨뎈צדק)와 공의(미쉬파트משְׁפָּט)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사 1:21). 쩨뎈과 미쉬파트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그들 안에 진리의 말씀이 더 이상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의 말씀의 부재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을 패역하고 부패하게 하며 이는 결국 의로운 자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가게 합니다. 종교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규칙과 틀과 전통을 따르게 하며 인간을 자기 의로 가득 차게 만들고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여 진실로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사욕을 따라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 을 따라가는 자들은 진리의 말씀의 부재와 오용과 인본주의적인 해석으로 인한 잘못된 쩨뎈과 미쉬파트에 빠질 것이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며 기준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의에 가득차 있는 종교인들은 의로운 자들을 핍박할 것이고 진실로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핍박 가운데 순교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말씀은 더 흥왕하여 멀리 퍼져 나가는 부흥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행 8:4).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지킨 자들은 왕이나 귀족들에게 씌워주었던 면류관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스데반처럼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드바림דבִָרִיְ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고, 마지막 때에 끝까지 말씀(드바림דבִָרִיְם)을 지키고 따른 자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에덴-동산으로, 시온 산에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은 제자들에게 큰 경고로 들렸을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처소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무너뜨리신다는 것은 이 세상을 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신다는 이중적 의미로 제자들은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임하심 즉,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의 통치와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 먼저 답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마 24:4).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가 겪었던 사탄의 미혹, 약속의 땅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광야 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이 숱하게 겪었던 우상숭배와 음란, 거역과 불순종의 미혹이 마지막 때 메시아닉 킹덤이 시작되기 직전에도 격렬하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혹 중에서도 가장 크게 일어나는 미혹은 자기를 메시아라고 속이는 미혹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겉잡을 수 없이 타락하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구원자를 간절히 찾을 것이고 사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탄이 진정한 구원자이자 온 땅의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속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메시아의 통치를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메시아의 통치가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탄이 통치 하는 세상 나라에 인간을 묶어두고 영원히 하나님께 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계획 이고, 이 계획의 실행을 위해 사탄이 쓰는 전략이 미혹입니다.

미혹은 속이는 것입니다. 속임은 거짓입니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고 사탄은 사람을 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비꼬아서 속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말의 전쟁, 드바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할 것인지, 사탄이 꼬아서 사람들에게 심어놓고 잘못 쌓아 올려진 사람의 말을 선택할 것인지의 기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탄의 미혹에 속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은 얼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는 자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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