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th 봐에트하난

ואֶתְחַנַן

그리고 내가 간구했다

파라샤 Deuteronomy (신) 3:23-7:11

하프타라 Isaiah (사) 40:1-26

브리트 하다샤 Matthew (마) 23:31-39 / Luke (눅) 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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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하난 אֶתְחַנַן – 모세의 간구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요단 동편의 두 왕이 정복되고 그 땅을 르우벤과 갓, 므낫세 지파의 절반이 차지하면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일이 더욱 현실이 되고 있던 그 때,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그의 소원을 구합니다. 이미 므리바의 사건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지만 고집 세고 교만하여 늘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40년 광야 여정의 막바지에 도달한 모세로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 입니다. 에트하난אֶתְחַַנַַן은 ‘은혜롭다, 호의를 보여주다’ 라는 동사 하난חַַנַַן이 재귀동사(히트파엘형)로 쓰이면서 ‘은혜를 구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몸을 구부리며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보인 충성과 사랑과 호의를 자신에게도 보여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브 라크רַב־לָך, ‘그만해도 족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의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을 거절하십니다(신 3:26).

모세가 아름다운 땅(하아레쯔 하토바הָאָרֶץהַ טּוֹבָָה)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정확한 이유는 그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화를 냈기 때문이었습니다(민 20:24). 백성들은 거듭된 반역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물로 인해 불평하였고 그들의 완악한 태도는 모세의 마음을 격동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이 화를 내신 것이라 말하면서 반석을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이 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물을 공급해 주신 은혜를 경험했지만 동시에 모세로 인해 하나님이 짜증을 부리면서 화를 내셨다는 잘못된 이미지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며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지도자는 분명 좋은 영향력을 흘려보내야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언하는 자로서 더 철저히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조절되지 못하는 감정은 순식간에 공동체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신의 위치를 더욱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이 맡기신 양들을 잘 이끌기 위해 권면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입장이나 사람의 입장에 서서 양들을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양들의 반복적인 공격과 불평에 지칠 때 자신도 모르게 화살을 쏘면서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양들은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되고 지도자는 본의 아니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통로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은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때, 선생님이 학생을 훈육할 때와 같이 여러 종류의 권위 관계 안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각 분야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권위를 주시면서 하나님을 대변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기에 더 자신을 돌아보고 말을 아끼며 성품과 속사람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온유했던 모세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비뚤어진 마음과 거역, 불순종은 전염병처럼 퍼져 모세의 마음까지 상하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태도에 집중한 찰나의 그 순간이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하게 하였고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평지까지 안내하는 것으로 마치며 눈으로 아름다운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모세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출이집트 세대의 완악함이 모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모세도 그들의 죄를 같이 짊어져야 하는 대속적 징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사건을 두고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언급합니다(신 1:37; 3:26; 4:21). 그러므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심판으로만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백성들의 죄는 모세의 죄가 되었고 그 역시 반역적인 백성들과 같은 일원이 되어 약속의 땅 밖에서 죽게 된 것과 같습니다. 지도자는 영광을 얻기도 하지만 더 큰 책임을 가지고 문책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많이 맡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구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무엇인가를 더 많이 받고 맡았다는 것이 특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책임과 무게가 따릅니다. 그리고 그 책임과 무게는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가 필요합니다. 한 명의 지도자가 온전히 서면 한 공동체가 보호를 받고 건강하게 세워져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를 향한 중보는 곧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향한 기도가 됩니다. 에트하난אֶתְחַַנַַן, 우리가 하나님께 또 누군가를 향해 보인 사랑과 은혜의 간구는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되게 하는 규례와 법도

약속의 땅이 보이는 경계에 서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규례(후킴חֻקִּים)와 법도(미쉬파팀מּשְׁפִָּטִים)를 선포합니다. 규례로 번역된 후킴חֻקִּים은, 토라의 기본 뼈대가 되는 십계명과 이 십계명을 자세히 보충 설명해주기 위한 세부 법들입니다. 후킴חֻקִּים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인 계명들(미쯔봍מִצְווֹת)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후킴חֻקִּים에 어떻게 재판하고 판결하고 심판을 집행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추가된 법을 미쉬파팀מּשְׁפִָטִי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규례(후킴חֻקִּים)와 법도(미쉬파팀מּשְׁפִָּטִים)는 언약 관계 안에서 언약의 이행을 위해 그들이 지켜야 할 책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게 하는 지혜와 지식이었습니다(신 4:6). 어느 민족에게도 없었던 이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공의로운 큰 나라가 되게 할 것이었습니다(신 4:8).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복종을 요구하면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이방신들의 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다른 민족과 다른지, 그리고 그들이 차지하게 될 땅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다스려져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그들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규례와 법도를 통해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 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도록(신 4:39)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분리된 자리에는 사탄들이 끼어들어 하나님 대신 사람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신이라고 믿거나 혹은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다른 신이 없음을 분명히 알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 죄와 죽음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 알라’는 것부터 시작 하셨고 이것을 위해 규례와 법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앎으로 정체성을 바로 세우게 하셨고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규례와 법도들의 가장 우선순위이자 핵심은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신 4:15-24). 거룩한 산 호렙에서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습니다(신 4:15).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 보기를 간구했던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의 뒷모습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형상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들조차 자기들의 눈과 몸과 발을 가릴 정도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그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서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이것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 낸 다른 신을 모셔 들이는 일과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순간 초월적이며 신비한 하나님을 축소시켜서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에 봉사하는 신으로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형상화된 모양은 하나님의 실재를 축소, 격하시킬 뿐 아니라 신이 아니면서 신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멸망으로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우상숭배를 강력하게 경고하시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또 한 가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의 일곱 족속들과 어떤 조약이나 혼인관계도 맺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다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여 하나님과 분리시킬 것을 아셨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철저히 찍어내고 불사르도록 명령하십니다(신 7:2-5). 그리고 명확하게 선포하십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신 7:6)

그들이 하나님의 성민이 된 이유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무언가 더 뛰어나서도 아니고 오직 그들을 사랑하심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기 위함입니다(신 7:7-8).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선택되고 사랑받은 백성으로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한 가지입니다.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는 이 세상에 다른 신은 없으며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선언이자 하나님이 그 백성을 사랑하신 고로 택하셨다는 증거이며(신 4:37; 7:8) 선택하신 백성들이 영원히 축복받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신 4:40).

쉐마שמַע, 하나님의 사랑의 심장을 전하는 소리

끝까지 책임지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하나됨의 여호와이십니다(신 6:4). 한글 성경의 여러 번역본에서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도나이 에하드יְהוָה אֶחָד의 에하드אֶחָד는 ‘하나’라는 의미이지만 ‘유일한 하나’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유일한 단일 개체라는 의미로써 ‘오직 하나’ 혹은 ‘유일한 하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야히드יִָחִיד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창 22:2)’에서 독자를 의미하는 야히드יִָחִיד는 기수적인 ‘하나’를 의미한다면 에하드אֶחָד는 연합적인 ‘하나’를 의미합니다. 쉐마 본문에서 쓰인 ‘하나’는 야히드יִָחִיד가 아니라 에하드אֶחָד이며 오직 하나 밖에 안되는 유일한 단수의 하나(야히드יִָחִיד)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이 모여 하나됨을 이룬 연합단수형으로서의 하나(에하드אֶחָד)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3은 야히드יִָחִיד적인 대답이라면 1+1+1=1은 에하드אֶחָד적인 대답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서 신명기 6:4을 번역할 때 에하드אֶחָד라고(하나, 하나됨) 적혀 있는 히브리어의 의미를 야히드יִָחִיד로(유일한 하나) 번역을 해서 이 쉐마 본문에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라는 존재양식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흐리게 이해되도록 해버렸습니다. ‘하나됨oneness’, ‘연합됨united’으로 이해되어 번역되어야 할 에하드אֶחָד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표현해주는 가장 중요한 존재 양식의 표현이며 그 하나님의 하나됨 안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초대하여 들어오게 하셔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게 하신다’는 의미까지 확장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만물을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됨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한 하나됨 안에 초대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신 7:9). 신실하신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엘 하네에만הָאֵל הַנּאֱמָן은 ‘확실하고 충실하여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의 땅뿐 아니라 그 땅을 통해 받게 되는 축복과 자손의 축복, 더 나아가 열방의 축복까지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규례와 법도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면서 그들이 불순종할 경우 그들이 약속의 땅은 물론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결국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거나 무너뜨리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반드시 모든 약속이 다 완전히 이뤄지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하나님을 배신할 것을 아셨음에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시 위로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사 40:1). 누구도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며 교훈하거나 지식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사 40:13-14).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이요, 저울의 작은 티끌이며 먼지 같을 뿐입니다(사 40:15). 그분은 수효대로 만물을 만들어 내셨고 만드신 모든 것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세심하고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입니다(사 40:26). 감히 어떤 형상으로 그분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6-7)

십계명으로 사랑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모세는 ‘쉐마שמַע 이스라엘’이라고 크게 외칩니다(신 6:4). 그들을 향해 ‘들으라’고 외친 모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연합되어 하나됨을 이루신 엘로힘을 사랑하고 그분과 연합하라고 명령합니다(신 6:4-5). ‘쉐마שמַע’라는 모세의 외침은 ‘너희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너희와 얼마나 연합되어 하나되고 싶어 하는가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신지를 먼저 듣고 또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됨을 이루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들과도 하나됨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듣고 우리를 영광스럽고 영원한 자리로 초대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쉐마, 들으라’고 외치시면서 ‘쉐마’를 교육하라고 말씀하시오늘고 가정에서부터 쉐마 교육을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쉐마 교육은 첫째, 먼저 부모 세대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신 6:6).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반복하려면 끊임없이 말씀을 읽고 읊조려야 하며, 반복해서 말씀을 읽고 읊조리다 보면 말씀이 외워지기 때문에 쉐마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말씀 암송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너의 마음에 새기라는 의미는 말씀 암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을 받고 그것을 반복하고 암송하여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자녀에게 가르쳐야 하는 말씀은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쉐마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 방향성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말씀을 반복하여 암송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마음이 느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쉐마하고 그것을 반복하도록 명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씀에서부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새긴다’라는 히브리어는 미래형으로 쓰여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더 깊은 의미로 메시아닉 킹덤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토라를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쓰실 것을 예표합니다(렘 31:33).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의 죄성과 악함을 제거하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존재에 일어나게 될 이와 같은 변화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이라고 말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이전의 존재)은 지나갔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5:17).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새 언약을 받고 회개를 통해 마음의 할례를 경험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으로 메시아닉 킹덤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대에 점차적으로 성취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함께 메시아닉 킹덤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새길 것이다)”라는 신명기 6:6의 말씀은 그 날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을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가르쳐야 합니다(신 6:7). 보이고 들리는 것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라 명령하십니다.

셋째, 손목과 이마에 표를 삼아 하나님 사랑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신 6:8). 손은 행동을 의미하며 이마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도록 가르치라 말씀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몸의 일부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집의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기록하여 우리가 사는 공간, 장소에도 말씀이 일부가 되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신 6:9). 이렇게 하여 우리의 몸, 마음, 그리고 우리가 거주하는 곳까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가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규례와 법도를 듣고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랑을 잊지 말라고 하심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시작하셨고 사랑으로 행하셨으며 사랑으로 기다리셨고 사랑으로 완성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것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의 본질은 사랑이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들 외에 더 많은 세부 조항들을 만들어 놓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슈아로부터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라는 독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다 지키지 못할 법들을 만들어 놓고 지키는척함으로 외식하였고 예슈아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마 23:3),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못 들어 가게 하는 자들(마 23:13),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마 23:15)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고(마 23:23)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크게 분노하심으로 책망하셨습니다(마 23:28,33). 그들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 종교적인 행위만 강요함으로써 영적으로 눈먼 자가 되어 백성들을 미혹하고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사랑이 빠진 규례와 법도는 책임과 강요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백성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슈아는 ‘인자는 율법을(토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8). 그리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롬 13:10).

세례 요한 역시 침례를 받기 위해 나온 무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내뱉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눅 3:7-8).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고, 정해진 세금 외에 더 거두어 들이는 부정직함, 무력으로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말했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실제적으로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눅 3:11-14).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행위는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향해서는 무자비함과 폭력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꿰뚫어 본 세례 요한은 회개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변화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토라의 말씀의 본질이 회복되게 하였습니다.

쉐마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쉐마는 하나님의 축복이 자손대대로 흘러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쉐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편지입니다. 쉐마를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아버지의 마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듣고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게 될 것입니다(딤후 3:2-5). 그러나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듣고 행하고 지키기로 결심하는 자들은 오시는 킹덤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예슈아와 함께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히 남아 존재하게 될 것인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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