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th 에케브

עֵקֵב

결과적으로

파라샤 Deuteronomy (신) 7:12-11:25

하프타라 Isaiah (사) 49:14-51:3

브리트 하다샤 Hebrew (히) 11:8-13 / Matthew (마) 16:13-20

말씀을 누르면 성경을 읽으실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Clicking the word will take you to a Bible reading page

결과적으로 예수님으로 인해(에케브 עֵקֵב)

다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또한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기 위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속량하셨습니다(신 7:8). 그들의 의로움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마음이 정직함으로 인한 것도 아닌 하나님의 완전한 언약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라(신 7:11)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한 가지를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지키시며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고 누리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신 7:9,1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게 되면 결과적으로(에케브עֵקֵב) 그들은 하나님의 인애(헤세드)와 사랑으로 복과 번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어 에케브עֵקֵב는 '결과적으로'라는 뜻도 되지만,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일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과 복과 번영이 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에케브עֵקֵב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과 복과 번영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에케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그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그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회개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가 사랑과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지 못하고 늘 벗어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긍휼히 여기지 말고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 7:16). 하나님의 눈에 가증히 여기는 것들은 작은 것이라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신 7:26). 우상숭배는 죄와 올무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 그 뿌리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을 죄의 속박 아래로 끌어내리는 사망의 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더욱 토라를 갈망하고, 토라의 삶을 살기를 힘쓸 때 우리는 우상숭배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진멸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이 참 신이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 수 있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유이시며 결과이십니다(에케브).

네 행복(토브)을 위하여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행복’이라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טוֹב입니다. 토브의 기본적인 의미는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향해 토브,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가 완벽하였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토브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그냥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닙니다. 토브의 뜻은 ‘좋다’이지만 이것은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번영, 유익, 행복, 뛰어남, 부유함, 기쁨, 그리고 지적 능력’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토브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가 바로 축복과 행복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토브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는 토브 메오드טוֹב מְאֹד, 매우 좋다고 하셨습니다. 메오드מְאֹד라는 히브리어 부사는 ‘넘치도록, 많이, 위대하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토브 메오드 טוֹב מְאֹד’라고 하신 이유는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게 되면서 사람들로 인해 땅에 에덴-동산의 상태가 더 증가되고 확장될 것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토브’하게 창조하신 세상에서 사람이 그 ‘토브’한 상태를 더욱 확장되고 충만하게 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를 ‘토브’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을 스스로 가지게 되어 하나님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기준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사람은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חָטָא는 ‘과녁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토브’의 상태를 벗어나자 사람은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행복을 찾고 번영해보려 했지만 사람의 행복과 번영의 방법은 비교에서부터 시작한 착취, 욕심, 강압 등의 방법으로 빼앗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번영과 행복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고 또 어떻게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토브’한 상태를 잃어버리고 ‘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그 질서로 사람을 돌아오게 하여 다시 ‘토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어떤 것이 진정한 ‘토브’이며 이것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을 창조 질서 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면서 번영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토라들을 허락하셨고 이것은 하나님의 킹덤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토브’한 상태가 되며 번영과 축복,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말씀 안에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토브’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행복과 기쁨, 부유함, 번영, 유익, 뛰어남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토브’는 망가졌지만 하나님은 ‘토브’를 다시 회복하고 찾아서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토브’를 회복하고 가장 ‘토브’한 상태인 에덴의 상태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에케브עֵקֵב) 하나님은 ‘토브, 번영, 행복’을 위해 토라(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주셨습니다. 토라는 ‘토브’의 삶을 회복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리고 토라는 예슈아로 충만하며 토라는 곧 예슈아이십니다. 토라의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게 될 그 날에 만물 안에 창조의 원상태인 ‘토브’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땅의 장막과 믿음의 발걸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장래에 유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히 11:8).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이방인과 나그네로 그 땅에 거류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직 실소유로 주어지지 않은 땅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장막에서 이 믿음의 유업을 이삭과 야곱에게 전해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밟는 곳을 다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믿음으로 밟으며 옮겨 다녔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장차 얻게 될 땅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장소이자 자신의 믿음을 후손들에게 전수해 주는 신앙 교육의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이삭, 야곱을 통해 열두 지파에게 흘러갔고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흘러가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상속받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얻게 하였습니다.

믿는 것이 눈 앞에 당장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나 살아 있는 동안 그 실상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믿음은 나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을 넘어서서 멀고 긴 시간의 여정이 지난 후 하나님의 정한 시간에 성취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란 당장 눈 앞에 펼쳐질 것을 바라기보다 그 이상,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먼 시야이며 믿음의 여정이란 멀고 긴 시야를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계속 나아가다가 그 다음세대에게 이어주는 것입니다.

삼 대가 함께 거했던 아브라함의 장막은 언약의 장막이며 믿음의 공동체였고 장래에 이뤄질 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뻐함으로 언약의 성취를 미리 맛보는 장소였습니다(히11:13).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눈 앞에 있는 것에 연연하며 믿음의 시야를 갖지 못하고 믿음의 여정을 걷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터들, 기초들)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기초들이 있는 성을 바라볼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시야는 믿음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때에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기초들(12기초석과 12문)을 갖춘 새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자손들에게 전해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라 자신도 아브라함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면 죽은 것과 같은 자궁에서 생명을 잉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히 11:11).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다’고 믿은 사라의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는 기적이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높고 멀게 만들어 주며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이어가면서 이뤄지도록 합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유업을 받은 이삭과 야곱, 이 가정의 텐트는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 받은 유업을 전수하는 장소였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야를 자녀들에게 나누는 장이었습니다(히 11:9). 그래서 아브라함의 텐트는 쉐마 교육이 이뤄지는 가정이면서 학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육의 장소는 가정이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때에 얼만큼의 일이 이루어지는가와 나의 때 이후에 이루어질 일이 무엇인가를 보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야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믿음의 시야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야가 지금 우리의 가정과 교회들에게 필요합니다. 믿음의 시야가 확보되면 텐트 즉, 가정에서의 대화가 거룩해지고 확실해지며 믿음의 진보가 되는 장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확실한 믿음을 가르치고 전수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세대와 세대를 끊어 놓아 가정을 해체시키는 것은 사탄의 핵심 전략들입니다. 믿음의 시야의 확보는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계략들로 점점 세대가 단절되며 어두워가는 이 시대에 빛을 밝히는 거룩한 믿음의 텐트에서 세대와 세대 간에 믿음의 전수가 일어나는 것을 보길 소망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앉은 각 가정의 텐트(장막)는 믿음의 시야를 넓혀 주는 장소이며 다음 세대에게 믿음이 유업으로 이어져 언약이 성취되도록 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장막은 바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멀리서 바라본 하나님의 성, 새 예루살렘을 우리도 믿음으로 바라보며 자녀들에게 ‘쉐마’를 듣게 하고 지키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하는 그 날, 그 성에서 함께 황금길을 거닐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Video Block
Double-click here to add a video by URL or embed code. Learn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