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th 키 타보

כּי תָבוֹא

네가 들어올 때

파라샤 Deuteronomy (신) 26:1-29:9

하프타라 Isaiah (사) 60:1-22

브리트 하다샤 Luke (눅) 24:44-53 / Matthew (마) 4: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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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예배, 기쁨의 예물, 보배로운 백성

신명기 12-25장에 걸친 십계명의 확장된 세부 규례들과 법도들이 마무리되면서 마지막으로 모세는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키 타보כּי תבוֹא) 거기에 거주할 때(신 26:1)’ 그 땅에서 얻게 될 첫 소산물을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기쁘게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신명기 12장에서 세부 규례와 법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모세는 가장 먼저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에서 예배를 올려드릴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모든 세부 규례와 법도들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26장에서 다시 한번 모세는 그 땅에 가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예배를 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이 직면해야 할 수많은 도전과 위협,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안은 ‘예배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부적인 규례들과 법도를 지키려 애쓴다 할지라도 사람의 타락한 본성과 에워싸고 있는 죄악으로 가득 찬 환경들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힘을 고정하여 드리는 예배의 삶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세부 규례와 법도들을 가르치실 때 다른 것보다 예배의 삶을 먼저 강조하셨고, 또 모든 가르침을 예배의 삶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차지하게 하실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정착하게 되면 가장 먼저 풍성한 소산물들을 누리게 될 것인데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얻게 된 소산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토지 소산의 첫 수확물들(열매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가지고 가서 올려드리라고 합니다(신 26:2).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의 모든 첫 수확물(열매)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보일 때 ‘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신 26:3)’, ‘여호와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나이다(신26:9)’ 라고 고백하며 모든 풍성한 공급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게 될 추수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풍성하게 하실 모든 것에 대한 기대와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 하나님께 드려진 첫 열매입니다.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열방 중에 하나님을 아는 백성을 많이 추수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하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슈아를 믿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써 열방 구원과 추수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곧 대추수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이후 예슈아가 오실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37:31-33의 예언에 따라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가 예루살렘을 세워서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되었으므로, 현대 이스라엘은 메시아닉 킹덤의 시온의 첫열매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열방 중에서 예루살렘, 시온을 향하여 나아오며 토라의 길을 걷는 남은 자들도 시온의 첫 열매입니다.

예슈아는 모든 잠자는 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시고, 예슈아의 부활을 시작으로 신실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온 모든 믿음의 조상과 성도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모든 첫째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심을 수도 없고 수확의 기쁨을 가질수도 없는 광야에서의 오랜 시간 끝에 들어가 차지하게 된 땅에서의 첫 수확물(열매)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더욱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하신 땅에서의 첫 수확물(열매)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먼저 올려 드림으로 감사하고 수확물을 레위인이나 나그네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기쁨을 함께 누리라고 하셨습니다(신 26:11). 광야와 같은 이땅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메시아닉 킹덤이 시작되기 직전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 시온의 첫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토라와 말씀을 배우러 가자고 외치는 열방의 민족들이 있을 것인데(사 2:2-3) 이미 지금부터 토라와 말씀을 향해 마음을 돌이키고 말씀을 듣기 위해 시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가 시온의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인 우리들로부터 시작하여 더 많은 열방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 시온과 함께 서서 주님께 드려질 그 날을 기대합니다.

신명기 14:28-29에서 말씀하신 매 삼 년의 십일조의 규례가 이 본문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모세는 제삼 년째 되는 해의 십일조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번 더 상기시켜 줍니다(신 26:12).

토지를 통해 얻은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올려드렸고 십일조를 통해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 즉,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와 전임 사역자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을 돌보았으니 하나님이 다시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와 사업과 토지에 복을 내려 달라는 당당한 간구는 나눔을 통해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의 공급과 풍요를 누릴 때 더 큰 복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나눌 때 우리가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린 사람이 그것을 슬픈 날에 먹지 않았고, 부정한 몸으로 떼어 주지 않았으며, 죽은 자를 위해 쓰지 않았음을 고백하라고 하셨습니다(신 26:14) 십일조를 드리러 나아오는 곳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이와 같은 고백을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슬픔, 부정, 죽음이 성전에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으로써 하늘 성전을 반영하고 있는데 하늘 성전에는 슬픔과 부정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늘의 영역에 닿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는 모든 눈물이 씻겨지고 슬픔대신 기쁨과 위로가 있고, 정결함과 거룩함이 있으며, 죽음대신 생명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반영하고 있는 땅 성전에도 기쁨과 거룩, 생명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형제들에게 나누기 위해 드리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쁨과 거룩,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이자, 하늘의 영역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형제들을 위해 나누면 거룩한 처소에서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땅에도 늘 풍성함이 있게 하시도록 축복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신 26:15). 축복기도를 올려드리라고 한 것은 축복을 약속하신 것과 같습니다.

십일조에 대해 현대 신학과 교회는 이런 저런 해석들을 하고, 경우와 상황에 따라 바꾸기도 하지만 말씀(토라)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소산물의 십분의 일, 십일조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하늘의 영역입니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나눔으로써 풍성해지는 나라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은 하나님께, 형제에게 나눌 것은 형제에게 나누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길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광야에서 유랑하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에 정착함으로 삶의 안정감과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종살이하던 연약한 민족을 다른 민족들 위에 높이시며 강하게 하시고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땅에 복을 주지 않으시면 땅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땅으로부터 얻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로 올려드리고 기쁨의 예물로 바칠 때, 그리고 그것을 형제들과 나눔으로 형제들에게 결핍과 곤고함이 없게 할 때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한 축복의 열매를 나눠가지는 삶이야 말로 예배의 삶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고(신 26:16) 여호와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소리를 들을 때(신 26:17)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로운 백성(쎄굴라סְגֻלָּּה, 신 26:18), 하나님의 소유요 신부라 부르실 뿐 아니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셔서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성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신 26:19).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길은 그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은 신부를 단장하는 아름다운 예복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신 토라의 계명들과 말씀들이 이스라엘을 신부로 단장하였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있는 토라 예슈아가 직접 자신의 사도들을 단장하여 주셨으며, 사도들은 열방 중 하나님과 의(쩨뎈)의 관계를 가지고 예슈아를 믿는 믿음 위에 서기로 한 자들을 토라로 단장해 주었고, 이제 이스라엘과 열방이 하나의 토라, 하나의 영, 하나의 진리이신 예슈아로 인해 하나되어 함께 신부로 단장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교회,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슈아 안에서 함께 보배로운 백성이 되었고, 될 것입니다.

복과 저주, 선택과 결정

이스라엘 백성은 세겜 땅 한 가운데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바라보면서 축복과 저주 사이에 서 있는 자신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매 순간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있을 때 복과 저주의 산을 바라보면서 각 산에서 선포된 복과 저주를 기억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지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바룩בָּרוּך은 ‘무릎’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높일 때, 혹은 상대에게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요청하거나 바랄 때 사람은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순종과 겸손의 의미입니다. 축복은 상대를 향한 존중과 사랑을 가지고 상대가 모든 면에서 더 잘 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신부로 맞으시고는 온 우주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서 겸손하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번영과 잘됨을 위해 나는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네가 의롭게 되고 너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일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 상대가 잘 되도록 모든 것을 다하는 마음 이것이 축복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는 ‘당신이 잘 되도록 나는 마음 다해 당신을 지지하고 도울 것입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송축합니다, 축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서 우리의 잘 됨과 우리 삶에 선한 일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것을다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잘 되는 것, 우리 삶에 선한 일이 이뤄지는 것은 우리의 죄와 죄책감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우리가 모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7-28장의 복과 저주의 말씀은 현재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테스트지와 같아서 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은 기대이든, 긴장이든 내 마음을 휘저어 놓습니다. 현재 나의 삶이 들어가나 나가나 복이 되고 있는지, 나의 삶이 더 나아지고 있는지 아니면 자꾸 깎여 내려가고 있는지, 하는 일마다 잘 되는지, 나로 인해 나의 주변과 가족이 복을 받고 있는지, 심지어는 내 주변의 동, 식물까지 복을 받는지 나의 공급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이 신명기 28:1-14까지의 복의 말씀입니다. 이런 복들은 하나님이 하늘의 보물 창고를 열어서 때를 따라 쏟아 주시는 것입니다(신 28:12).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위를 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늘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현상 세계와 물질 세계에서 축복이 풀어지는 형통이 있는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우리가 할 일은 그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임하는 저주의 결과는 너무 참혹합니다. 저주의 내용은 크게 공의적인 측면(신 27:16-19), 음란 즉, 섞이는 것(신 27:20-23), 사람의 생명에 대한 것(신 27:24-25),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님의 킹덤의 기초는 의(쩨뎈)와 공의(미쉬파트)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에만 바르게 세워질 수 있고, 바르게 세워진 의가 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의가 깨어질 때 하나님은 저주가 임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킹덤은 거룩한 나라로 세상과 섞일 수 없습니다. 음란으로 세상과 섞이는 것은 저주가 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또한 저주를 받게 되는 길이라고 경계하십니다. 의를 잃어버리고(하나님과의 관계),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며, 세상과 마구 섞이고(음란과 우상숭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살인)이 곧 저주를 받는 길입니다.

히브리어에 저주라는 단어는 아라르אָרַר와 칼랄קָָלַ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라르אָרַר는 말 그대로 ‘저주’라는 뜻이고 칼랄קָלַל은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지 않고 아주 낮아지는 상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뭔가 문제가 생겨서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떨어져서 무시당하고 경멸 받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적 의미에서 저주는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불순종할 때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아무것도 아닌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고 그런 상태로 내가 내버려 둘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축복이 떠나면서 다른 나라들의 눈에 그들이 멸시받는 존재가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상태가 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면 다시 그들의 존재와 위치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이웃 나라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돌이키게 하기 위한 사랑의 매라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사랑의 매는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훈육하고 훈련하여 바로 세우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웃 나라라는 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훈육하고 훈련하여 바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저주는 그들을 떨어진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이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7-28장에 걸쳐 나타나는 저주는 징계를 통한 훈련과 교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신명기 27-28장에 걸쳐 나타나는 저주의 내용들은 마치 예언처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수 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7-28장의 축복과 저주(징계를 통한 훈련과 교정)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들이면서 동시에 예언적인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예언은 곧 역사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역사이면서 또한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현재 우리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마치 예언처럼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28장의 저주의 내용들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저주들을 보며 이스라엘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영원히 버림받았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저주는 원래 상태를 지키지 못하고 떨어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저주는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축복으로부터 그들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그들에게 저주의 상태를 허락하시면서 그들을 훈육하고 훈련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훈련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고 열방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여전히 그들을 훈육하고 훈련하고 계시며 그들의 훈육 상태는 열방에게 교훈이 되어 오히려 열방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백성이 복받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신다고 하셨는데 신명기 28:63에서는 상황이 바뀌어 하나님이 그들이 망한 것을 보고 기뻐하시게 되는 상태까지 되어 버립니다. 모든 저주의 마지막 단계는 종과 노예로 팔려가는 단계,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단계입니다.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 자유가 빼앗겨지고 나서야 돌이키지 말고 그 전에 깨닫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선택하는 상황을 놓으십니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죄와 거룩, 생명과 죽음은 경계를 맞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의 어깨 위에 맡겨져 있습니다.

모압 땅에서 갱신된 언약 -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  

시나이 산에서 언약을 맺고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출이집트 세대의 거역과 불순종으로 이스라엘 모든 세대는 언약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영, 혼, 육의 상태가 될 때까지 광야에서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악했던 출이집트 세대가 다 죽고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을 마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그들에게 다시금 언약을 상기시키고 갱신해 줌으로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으로 그 땅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9장에서는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운 언약 외에 모압 땅에서 그들과 추가로 맺은 언약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고 들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신 29:3)’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시험은 맛싸מַסָּה, ‘증명하다’는 뜻이고, 이적은 오트אוֹת, ‘사인Sign’이라는 뜻이며, 기사는 모페트מֹופֵת,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기적이라는 뜻의 모페트מֹופֵת는 야파יָפָה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야파יָפָה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증명해 보여주셨고, 사인Sign을 주셨으며, 아름다운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주지 아니하셨다(신 29:4)’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는 그들에게 비밀스럽게 감춰둠으로 어떤 것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밀은 예슈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유와 실제가 풀어짐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모든 비밀이 밝히 드러나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비밀은 예슈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슈아를 통해 드러난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더욱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너무나 쉽게 우리의 삶에 파고드는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나와 가정과 공동체,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말씀을 더욱 사수하는 것뿐입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 우리는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듣는 것을 강조하셨을까요? 내가 계속해서 세상의 것을 듣고 보고 있다면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듣고 보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고 유혹당하는지 잘 아셨기에 말씀을 듣고 들어서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으로 살 것을 끊임없이 강조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인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반역하였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불평을 듣고 모세와 아론에 대해 반역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이집트할 때 섞여 나온 이방 민족들의 불평을 듣고 같이 불평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듣고, 보고, 영향을 받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성이 결정됩니다.

또 아무리 내게 들려오고, 보여지고 있는 것이 악하다 할지라도 내가 바른 판단으로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에 따라서도 삶의 방향성이 결정됩니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쩨뎈צֶדֶק)가 세워짐으로 바른 판단과 결정(미쉬파트מִשְׁפָט)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신 29:3-4). 하지만 예슈아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함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눅 24:44)’을 가르치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눅 24:45). 예슈아는 말씀의 모든 비밀을 가르쳐 보여 주심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고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눅 24:48).

유대인이 먼저 말씀을 맡은 자로서 말씀을 잘 지켜왔지만(롬 3:2) 예슈아가 아니면 그들이 이 모든 신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유대 민족이 그들에게 가려져왔던 예슈아를 알게 될 때 이사야 60장의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임하고 회복될 뿐 아니라 온 열방에 하나님의 영원한 킹덤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속히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 60:22). 예루살렘의 영광의 회복, 그리고 온 열방이 함께 누리는 시온의 영광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될 때 속히 이루어질 뿐 아니라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사 62:1-7)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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