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th 쉐모트

שְמֹות

이름들

파라샤 Exodus (출) 1:1-6:1

하프타라 말씀Isaiah (사) 27:6-28:13, 29:22-23, Jeremiah (렘) 1:1-2:3

브리트 하다샤 1Corinthians (고전) 14:13-25/ Matthew (마) 2:1-12

이름들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속 계획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쉐모트שְׁמֹות ‘이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는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고(출1:7) 창세기에서 보인 하나님의 구속의 청사진이 이 민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행될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장해가면서 받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자신들의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구속의 계획이 하나씩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46:8-27과 출애굽기 1:2-5에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의 이름이 두 번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은 인류 역사 가운데 두 가지 큰 구속의 사건이 있을 것임을 예표합니다 . 하나는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하나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메시아를 통해 구원받게 될 온 인류의 구속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을 통해 이뤄진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 사건은 마지막 날 온 인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속될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그분의 강력한 의지로 실현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미드라쉬 라바 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12아들들의 이름을 통해 어떻게 실현되었고, 또 실현될 것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르우벤은 하나님이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셨음을 나타내고(출3:7) ‘듣다’라는 뜻을 가진 시므온은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음을 나타냅니다(출2:24). ‘연합’이라는 뜻을 가진 레위는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중에도 함께 하셨음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마치 바짝 마른 떨기나무(이스라엘 민족의 상태)이지만 거룩한 불(하나님의 임재)이 그 나무를 태우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고 계심을 상징하는 것과 같습니다(출3:2).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보고 들으셨다는 것은 그들을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고통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셨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유다의 이름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출15).

‘보상, 값을 지불하다’라는 뜻을 가진 잇사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이집트 할 때 이집트인들로부터 재물을 얻고 나오게 하심으로 그 땅에서 오랜 시간 노예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수고와 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나타냅니다(출12:36). ‘거주하다’는 뜻의 스불론은 하나님의 미쉬칸(처소, 미쉬칸)이 그들 가운데 세워짐으로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나타내고(출25:8),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베냐민은 하나님의 오른손이 위대한 능력으로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하실 것을 나타냅니다(출15:6).

‘심판’이라는 뜻의 단은 하나님이 이집트(세상)를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임을(출6:6-7), ‘경쟁에서 이겼다’는 뜻의 납달리는 하나님의 큰 승리를 나타냅니다. ‘군대의 추격’이라는 뜻의 갓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군대로써 이집트에서 나와 원수들을 추격하고 공격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차지하게 될 것임을(야라쉬יָרש), ‘기쁨, 축복’이라는 뜻의 아셀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될 것임을 나타냅니다(출19:6).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름, ‘더하다’라는 뜻의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더 큰 구원, 온 인류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더해지고 확장될 것임을 예표합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12아들 이름들의 명단 가운데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아들들에 앞서 이집트에 있었고(출1:5) 이것은 다른 아들들과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요셉이 먼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45:5). 메시아이신 예슈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처음(먼저)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죄의 값을 지불하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온 인류의 통치자로 그분의 보좌에 앉을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요14:2-3).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면서 사명입니다. 이스라엘יִשְרָאֵל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였을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으로 이 이름은 싸라שָרָה라는 단어와 엘אֵל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싸라שָרָה는 ‘힘을 가지다, 이기다, 승리하다’는 뜻이고, 엘אֵל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יִשְרָאֵל은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셔서 모든 구속의 계획을 완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완전한 승리자이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이 이름을 통해 이들의 사명이 구속의 계획이 완성되기까지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יִשְרָאֵל은 ‘그가 하나님처럼 다스릴 것이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드신 후 만물을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그 이름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고 이들의 사명은 세상의 악한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사명은 메시아로 인해 그분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인 우리들에게로 확장되었고, 마지막 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메시아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이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사탄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과 사명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속여왔고 방해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나타나는 한 사람과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오히려 사탄의 전략을 완전히 패배로 돌아가게 하는 역전의 사건들이 있었던 것을 봅니다. 우리의 이름에 주어진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사탄은 집요하게 속이고 거짓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를 참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만왕의 왕의 권위 아래서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민족의 이름에 주어진 정체성과 사명을 완수할 것입니다. 또한 나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시며(렘33:2) 승리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들으신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도 잊고 지냈던 모세는 그분의 부르심 앞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나다”라는 답을 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

“I Am Who I Am”(Exo. 3:14)

한국어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소개는 하나님의 현재성에 대한 설명이자 과거에도 미래에도 변함없이 늘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도 그렇게 계셨고 미래에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 한 가운데서 즉,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영광의 불과 빛으로 함께 하고 계셨고, 함께 해 오셨으며, 앞으로도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이런 하나님이 모세를 자신의 백성에게로 보내신다는 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또한 하나님의 불변하심(변하지 않으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 그분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약1:17)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은 예슈아를 통해 자신의 속성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4:8)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가운데 함께 해 오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함께 하실 것이며, 고통 중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던 하나님은 앞으로도 고통 중에서 반드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제 있었듯이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생명을 살리는 자

세상의 절대 권력자의 명령을 거스르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살린 두 여인 십브라와 부아에 대해 토라는 이 여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증거합니다(출1:17). 이집트의 거대한 힘에 억압당하고 있었던 대다수의 이스라엘 자손들과 달리 이 두 여인의 삶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은 파라오의 권력도, 이집트의 시스템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어두움을 믿는 믿음입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두려워한 것은 어둠조차 창조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이집트가 주는 벌이나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 컸기 때문에 파라오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세상의 힘과 억압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 조차도 꺾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위협에 담대하고 하나님이 품게 하신 뜻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이렇게 세상의 명령을 거부할 때 세상은 더욱 악하게 나아갑니다. 파라오는 산파들이 남자아이를 살려 두자 바로 나일강에 던져 죽여버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세상의 권력 앞에 비참히 죽어갈 때 하나님을 아는 부모,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어머니였던 요게벳은 한 남자 아이를 살려 둡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이가 그의 생명을 지키게 됩니다.

사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사람과 거룩한 세대가 태어나지 못하게, 혹은 살 수 없도록 죽이지만 그 와중에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을 이루십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살려준 아이들, 요게벳이 살려 낸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친히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한 역사에 참여하는 세대가 됩니다. 사탄이 삼키고 죽이고 있는 이 세대를 살려야겠다는 절박함이 있다면, 또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줄 알고 있다면 세상의 시스템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이 주는 생각과 타협하지도 말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 삶에 실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담대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나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증가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십브라와 부아, 요게벳은 지도자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성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역할을 끝까지 감당했을 뿐입니다. 산파는 산파로서 아이들을 살렸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를 보호하고 지켜내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능력이나 지위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신 역할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지키면 됩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머니들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낙태법이 통과되고 동성애를 인정하면 우리의 다음 세대의 앞날은 암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히브리어 레헴רֶחֶם은 ‘자궁’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라함רָחַם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라함은 ‘깊이 사랑하다, 자비를 가지다, 부드러운 애정, 긍휼히 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거룩한 자궁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비와 긍휼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분의 깊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세대들이 잉태됩니다. 이 세대를 보호하고 지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비, 어미의 세대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이름(쉠שֵׁם)은 부르심(calling) 이고 부르심의 목적은 구원(예슈아ֲַיֵשׁוּע)이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의 치밀함과 놀라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세우시는 구원의 순서와 방향(야곱이 에브라임을 오른쪽에 두고 므낫세를 왼쪽에 두고 축복한 것)과 그 완성의 비밀을 보았습니다(창48:8-22). 출애굽기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구속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을 봅니다. 각자의 역할이 모두 다르고, 각자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바라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그냥 단순히 던져지고 불려지는 쉬운 말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부름 받은 자를 기다려 주십니다. 부름 받은 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말로 할 수 없는 치열한 과정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 치열한 과정 가운데 부름 받은 자들은 고난을 받기도 하지만 주님은 원수들에게 하는 것과 같이 다루지 않으시고 적당한 견책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사27:7-8). 고난을 통해 부름 받은 자들은 정결한 신부로 단장되어 갑니다.

이집트와 같은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일을 해라, 더 높이 쌓아라, 더 많이 축적해라,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성과를 내라고 요구합니다(출5:6-9).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do and do, do and do)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rule and rule, rule and rule)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a little here, a little there) 하게 합니다(사28:10). 이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멍에이자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주는 멍에로 인해 우리가 고통 받는 것조차도 우리를 겸손하게 다루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억압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섞여 있는 것들을 뽑아 내시고 제거하셔서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단장해 주십니다. 이렇게 단장된 신부들을 마침내 하나하나 모으시고 예루살렘 성산에서 구원의 감격으로 예배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사27:12-13).

우리의 이름(쉠שֵׁם)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과 사명의 끝에는 구원(예슈아יֵשׁוּע)이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예슈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그 끝에 예슈아(구원)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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