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th 봐예히
וַיְחִי
그리고 그가 살았다
파라샤 Genesis (창) 47:28-50:26
하프타라 1 Kings (왕상) 2:1-12
브리트 하다샤 1 Peter (벧전) 1:1-9 / John (요) 1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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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 – 에브라임을 통해 번성할 열방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애굽에서 17년을 지냈습니다. 147세가 된 야곱은 선조들에게 돌아갈 날이 가까움을 느끼며 요셉과 두 아들을 축복하기 위해 부릅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는 히브리어는 하말라앜 하고엘 오티, הַמַּלְאָךְ הַגאֵל로 ‘나를 구속하신 분이신 그 사자’라는 뜻입니다. 하말라앜הַמַּלְאָך은 ‘사자’라는 뜻이고 하고엘은 הַגאֵל은 ‘대신 대가를 지불해주어 되찾아주는 자’라는 의미이면서 ‘원수 갚아주고 원한을 갚아주는 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대가를 지불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기에 우리의 하고엘, 구속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초림 때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내셨고, 재림하실 때는 우리를 위해 원수를 갚아 주시고 원한을 풀어주심으로,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가 잃어버렸었던 모든 것을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초림 예수님의 고엘 사역과 재림 예수님의 고엘 사역은 우리에게 고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줍니다. 고엘 사역의 이 두 가지 측면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 희년이 오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에서 씨름할 때 자기에게 복을 주신 그 사자가 바로 하고엘, 빼앗겼던 것을 되돌려주실 분이며 나의 원한을 갚아주실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고엘의 구속과 건지심을 체험했기에 고엘을 향해(하말라앜 하고엘)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고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서 불려지고 알려지게 되며 이들이 세상에서 크게 번성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문장에서 ‘번식’ 또는 ‘번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베이드구 라로브וְיִדְגּוּ לָרב인데 이드구יִדְגּו는 다가דָּגָה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물고기(다그דָּג)가 알을 많이 낳는 것처럼 급속하게 증가increase하고 확장multiply되는 것을 말합니다. 라로브는 ‘많아질 때까지, 풍성하고 거대하고 위대하게 될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해 ‘물고기가 알을 한 번에 많이 낳아 급속하게 번식하는 것처럼 이들의 자손이 그 땅 한가운데에서 풍성하고 거대하고 위대하게 될 때까지 급속하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소서’라고 예언적으로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얹고 축복합니다(창48:14). 그 모습을 보고 요셉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고, 그런 요셉을 향해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민족을 이루고 그도 크게 되겠지만 동생 에브라임의 형보다 크게 될 것이고 그의 씨가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되리라”(창48:19)라고 예언합니다. 요셉도 대단한 영성가였지만 험악한 세월을 통과하고 맑은 영으로 이제 열조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야곱의 영성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겉사람의 기능은 쇠약하여져서 육신은 늙어 병들었고 눈은 어두웠지만 그의 맑은 영은 수백 수천 년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48:19 본문에서 야곱이 말한 ‘여러 민족’이라 번역된 멜로-하고임מְלֹֽא־הַגויִם은 ‘많은 이방 민족들의 충만함’이란 뜻으로 ‘에브라임의 씨가 많은 이방 민족들의 충만함이 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롬 11:25에서 말한 ‘이방인의 충만함’과 같은 개념입니다. 단순히 야곱 자신이 차자였기 때문에 차자인 에브라임의 편을 든 것도 아니었고, 에브라임이 인간적으로 더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에 와서 십 칠 년간을 이집트 땅에 살면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했고 앞으로 하실 일을 예언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에브라임의 후손이 ‘멜로-하고임 מְלֹֽא־הַגויִם‘, 많은 이방 민족들의 충만함’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며 예언하였고, 그 이방인의 충만함이 다시 이스라엘과 하나가 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각각 축복하고 요셉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 예언합니다창48:21. 요셉은 관습에 따라 당연히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으로 축복할 수 있도록 세웠지만 야곱은 비록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어도(창48:10) 그의 영은 깨어 있었기에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예언하였습니다.
야곱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단지 한 사람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가깝게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향한 계획이었고 멀게는 땅의 모든 민족을 향한 계획임을 야곱은 알았습니다.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보다 더 고난이 많았고 실수도 많았고 많은 역경들을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인 12지파가 나라를 이루는 기초가 되어야 했기에 치르게 된 대가 지불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큰 민족(고이 가돌גוי גָּדול)의 모습을 보았고, 더 나아가 이방인의 충만함(멜로-하고임)을 내다보았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험한 역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또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미 보고 계신 것을 야곱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기의 때에 이뤄질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 앞날을 보았기에 야곱은 자신의 삶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하나님께 경배합니다히11:13.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고난과 괴로움, 때로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그것을 붙잡으려고 나의 의로 말미암은 실수조차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뜻을 알아가도록 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믿음의 눈은 더욱 선명해지고 멀리 내다보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커지면 당장 내 눈앞에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앞날에 이뤄진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 시대에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소용돌이와 사탄의 사악한 발광 앞에 의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결국은 주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승리이고, 사탄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철저한 패배와 멸망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더 선명하게 하시고 크게 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엄청난 소용돌이 가운데서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야곱의 축복 – 분량과 역할 대로 축복받은 열두 아들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창49:28). 야곱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들이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지적하였고, 그들이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해(창49:1) 축복할 것은 축복하였습니다. 르우벤을 향하여는 그가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명확한 이유만 이야기하였고,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는 선을 넘어버린 잘못된 분노와 폭력으로 인해 흩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실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고, 레위 지파는 자신의 땅이나 영역을 받지 못하고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시므온 지파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왕의 오심을 준비하는 유다 지파와 함께 하게 되었고,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전을 지키는 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받은 것이 보기에는 축복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유다는 장자권을 얻었고 그의 가문에서 왕들과 메시아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온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값비싼 대가를 치렀던 요셉은 그의 이름처럼 많은 것을 더하는 장자의 축복을 받았으며 그를 통하여는 많은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뤄지리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받은 복들이 영원한 산들의 정상이 한이 없이 크고 높은 만큼 뛰어난 복들이며 그 영원하고 무한한 복들이 이제는 요셉의 머리의 정수리에 임할 것이라는 예언적 축복을 합니다.
"네 아버지의 복들이 내 선조들의 복들보다 더 크고 강하며 뛰어나서, 영원한 산들의 정상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이르렀으니 이 축복들이 요셉의 머리에 있을 것이며 그의 형제들 위한 나실인의 정수리에 있을 것이다" 창세기 49:26
야곱의 축복의 종류 중 어떤 것은 성품을 다루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 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성품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어떤 것은 미래적인 예언이었는데 결국은 모든 축복의 내용이 믿음의 승리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나라를 물려주면서 벌받을 사람에 대해서는 벌을 받도록, 상 받을 사람에 대해서는 상을 받도록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왕상2:1-12). 이것은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벌받을 사람에게는 벌을, 상 받을 사람에게는 정확히 상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시고, 공평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합당하십니다. 그분의 선하신 성품에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시지만 그 정도와 축복의 색깔은 모두 다릅니다. 그렇다고 더 좋은 축복, 더 안 좋은 축복이란 없습니다.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부르심destiny과 계획하심에 따라 필요한 정확한 것들을 주십니다. 이 축복은 받은 자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하는가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때로는 이뤄지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작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정확하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큰 비전, 큰 축복을 바라기보다 나의 삶에 허락하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에 합당한 비전과 축복을 주실 것에 감사함으로 구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왜 더 많은 것이 가지?’, ‘왜 나에게는 더 많이 오지 않지?’라는 마음은 1달란트 받은 자가 2달란트와 5달란트 받은 자와 비교하여 자신의 삶을 나태하게, 그리고 주신 분에 대한 불평으로 살았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어리석고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신뢰한다면 우리 삶에는 불평과 비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세기 49:28
열 두 아들을 축복하고 야곱은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둡니다(창49:33). 그는 죽기 전 요셉에게 “이집트에 묻지 말고 조상의 묘지에 묻어달라”(창47:30)고 부탁하였고 열 두 아들들의 축복이 끝나고 다시 한번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창49:29-30)고 당부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값을 지불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리브가와 레아가 묻힌 약속의 땅의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이 말 안에는 부활을 기대하면서 약속의 땅에 묻히기 원했던 야곱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이 “나는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창49:29)라고 한 말은 ‘나는 나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미 모여 있는 그 장소에 나도 함께 모여 있으려고 간다(네에싸프נֶאֱסָף, 모여지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장소는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이 땅에서 주어진 인생을 믿음으로 살아냈던 믿음의 선진들이 이미 모여 있는 장소이며 믿음의 후배들이 따라 모일 장소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살아냈던 사람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개인의 경주이자 믿음을 가진 자들과 함께 하는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그 장소는 바톤을 이어받고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고 있는 후배(혹은 다음주자)를 보며 하늘에서 응원하며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나의 믿음의 경주는 끝이 났어도 마지막 주자가 다 경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잠자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수 없고 상급에 대한 시상식도 개최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자인 우리가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믿음의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완주해야 할 것입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야곱이 이스라엘 열 두 아들들을 축복하며 준 것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벧전1:4)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이 유업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되었지만 예수님의 피뿌림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과(벧전1:1-2)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주었습니다. 야곱의 축복은 모든 민족을 향한 축복이었고, 요셉이 받은 축복은 모든 민족으로 뻗어가게 될 축복(담을 넘는 가지, 창49:22)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이렇게 성취되었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업을 받을 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근심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자들입니다벧전1:6. 왜냐하면 이 유업을 받은 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벧전1:7). 그래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 입니다!벧전1:9 한글로 번역된 성경들에서 ‘영혼’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쉬케ηχυψ’인데 이것은 ‘영’과는 구별되는 ‘혼’을 의미합니다. 혼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내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면서 생명을 얻어 거듭나게 되고, 이것은 구원의 여정의 시작입니다. 혼은 가장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어느 쪽에서 몇%의 주도권을 더 잡게 하느냐 덜 잡게 하느냐로 죽기 전까지 평생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가야 할 혼의 구원은 우리의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경건은 이 세상뿐 아니라 부활 이후의 상급과 영광과도 관계된, 신앙생활에서 평생 중요하게 다루며 수련해야 할 부분입니다. 육의 구원은 곧 몸의 부활을 의미하며, 부활의 새 아침을 기다리는 잠자는 자들이 영화(榮化)의 단계로 들어가는 구원의 최종 단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심었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 다른 부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어떻게 사용했느냐? 어떤 상태였느냐? 무엇으로 채웠느냐의 문제로 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혼의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22에서는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혼이 깨끗해지면 그 결과는 ‘거짓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게 됨’과 ‘순결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게 됨’입니다. 그리고 혼에게 ‘신령한 젖’을 먹여주라고 권면합니다(벧전2:1-2).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 무엇을 입력하고 무엇을 섭취하고 무엇을 보았고 들었느냐에 따라서 혼의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혼의 정결은 죄의 씻음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지은 죄가 씻겨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대신 해결해 주셨습니다(히1:3, 요일1:7). 우리가 할 일은 혼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생각, 감정, 의지가 정결할 때, 구부러지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행15:9)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롬12:2) 모두 혼을 정결하게 하는 일입니다. 혼의 정결은 믿음의 순도를 높이는 과정이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됩니다(벧전1:7).
유업이라는 히브리어는 나할라נַחֲלָה인데 이는 나할נָחַ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나할은 ‘흐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이나 시내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나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나할נָחַל에 히브리어 헤이ה를 붙여 나할라נַחֲלָה라고 하면 ‘유업’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유업은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 되는 것이 나할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으며 우리를 위해 마련된 하늘의 나할라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 곧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이미 아버지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았습니다(요1:12). 하지만 우리가 부활할 때, 아버지로부터 더 아름답고 영화로운 나할라를 받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혼의 구원을 이루고(빌2:12)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혼의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완주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와 요셉에게로 이어진 하나님 나라의 유업(나할라)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게 될 그 유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날에 당신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상급이 하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