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th 봐이가쉬
וַיִּגַּשׁ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갔다.
파라샤 Genesis (창) 44:18-47:27
하프타라 Ezekiel (겔) 37:15-28
브리트 하다샤 Luke (눅) 6:12-16 / Luke (눅) 24: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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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갈 때 알게 되는 아버지의 마음
한 제국의 총리에게 다른 나라에서 온 일개 목축업자가 감히 가까이 다가갑니다(창44:18, 봐이가쉬וַיִּגַּש). 그는 총리에게 자신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다가갑니다. 그가 구구절절 절박하게 나눈 이야기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형제들에게 요셉이 우리의 형제이고 혈육이니 죽이지는 말고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제안했던 유다입니다. 날마다 요셉 타령만 하며 어느 누구의 위로 받기도 거절하는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 나갔었던 유다입니다. 헤브론에서 아둘람 지역으로 가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지만 두 아들이 먼저 죽고 아내까지 죽었으며 어처구니없게 며느리를 통해 아들들을 얻는 기막힌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잃은 상실감을 경험하면서 비로서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못된 짓을 했는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가문의 유업이 이방 여인인 며느리가 꼭 붙잡을 만큼 어떠한 무게와 영광이 있는 것인지 깨달은 유다는 다시 아버지와 가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품으로 돌아온 유다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번번이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서서 말을 하고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야곱을 설득하기도 합니다. 베냐민을 꼭 데려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여정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베냐민을 잃을 상황에 처하게 되자 베냐민과 연결된 아버지의 생명까지 떠오르면서 그의 마음이 타들어 갑니다. 유다는 이집트 총리에게 감히 가까이 다가가서 구구절절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동생 베냐민을 향한 연민을 호소합니다(창44:14-34). 이 과정에서 유다는 자그마치 16번이나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내 아버지에게…”라며 아버지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며 아버지의 생명과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그 아들 베냐민을 위해서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는 유다의 절절한 모습에 결국 요셉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 터져 나오고 맙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향한 깊은 사랑과 22년의 긴 세월이 지나며 결국 꿈이 현실이 되어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더 이상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모든 사람을 다 물러가라 하고 11명의 형제들 앞에서 방성 대곡을 합니다. 두려워 떨며 당황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 요셉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였습니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까지 노예와 죄수의 신분으로 살다가 총리가 되었고, 7년의 풍년을 거쳐 이집트 온 땅을 치리하며 두 아들을 낳고 가뭄이 든지 2년째(창45:6), 형제들을 만나게 된 요셉은 명백한 변화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변화, 그리고 형 유다의 변화를. 2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은 요셉을 다루셨고(창37, 39, 40), 특별히 형 유다를 다루셨습니다(창38장).
인류 역사상 극적인 형제의 화해가 이뤄집니다. 사실 화해라기보다는 요셉의 일방적인 용서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고 요셉도 형제들에게 용서하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처음 그를 찾아온 형들을 보았을 때 이미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꿈의 성취와 도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기다린 것은 그의 형제들의 회개와 변화였고 그는 아버지와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유다를 보며 감동과 함께 밀려오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들의 형제됨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서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묻거나 따지지 않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또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유다와 요셉이 아버지로 인해 하나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될 때,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녀는 회복을 경험합니다. 사사로운 자기의 감정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더 본질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죽은’ 요셉을 잊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유다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 채 죄책감과 책임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유다도 아들 둘을 잃어버리는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절절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가 아끼는 동생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자녀를 낳고 아버지가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요셉의 지나간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심으로 한동안은 아버지의 집 생각을 잊게 하셨습니다. 같은 기간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함께 다룸을 받은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룸을 받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가게 될 교회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가 연합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의 열쇠는 ‘아버지’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
나는 요셉이라 – 요셉의 자기 계시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창45:3
요셉은 자기를 요셉이라고 형들에게 알립니다. 요셉이 자신을 요셉으로 알리는 순간 거대한 벽과 단단한 묶임들이 무너지고 풀어졌습니다. 한 순간의 미움으로 철이 없어 저지른 일이었다고 말하기에는 요셉의 형들의 행동은 너무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없어지기만 하면 자신들의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관심을 더 받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은 더 큰 죄책감과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요셉 때문에 날마다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아버지로 인해 오히려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는 더 어려워졌고 돌이킬 수 없는 죄로 인해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무거웠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앞에 설 때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더욱 아버지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신을 알리는 순간 그들은 죽었을지도 모를거라 생각했던 동생이 살아서 모든 가족을 구원할 자가 되어있다는 사실에 한 순간에 동생을 죽인 형들이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묶고 있던 죄책감의 사슬과 그들과 아버지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요셉이 “나는 요셉이라”고 알리는 순간은 마치 예슈아가 “내가 예슈아다”라고 알리는 순간과 같습니다. 예슈아가 구원자라는 것이 계시되고 드러나는 순간은 우리의 죄의 사슬들이 풀어지고 자유케 될 뿐 아니라 예슈아로 인해 아버지께로 나아갈 길을 얻게 되는 순간입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떤 형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면서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요셉의 선포는 예슈아가 마지막 날 자신을 죽인 이스라엘을 향해 부활을 알리면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슈아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예표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슈아가 자신을 온 우주의 통치자로 드러내시고 그 분이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게 되실 때 그 분은 우리를 가까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이 하늘에서 메시아로 내려오실 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찌른 바 되었던 예슈아를 바라보면서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장자를 위해 통곡하듯 통곡할 것입니다(슥12:10).
예슈아가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리고 예슈아를 만나는 순간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자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순간 형들이 해방되었듯이 예슈아가 자신을 계시하실 대 우리들은 죄의 노예에서 아버지의 자녀로 회복되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순간은 과거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전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예슈아가 자신을 메시아로 온 세상에 나타내실 때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완전히 뒤집힐 것입니다. 그 날에 완전한 하나됨과 자유가 성취될 것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 한 새 사람의 비밀
야곱의 자녀들 70명이 모두 고센 땅에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70이라는 숫자는 모든 민족, 열방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이 이집트로 들어갈 때, 그들의 구원 스토리(유월절, 홍해, 광야, 약속의 땅) 속에 모든 민족들을 구원할 스토리들도 함께 짜놓으셨습니다.
요셉은 므낫세מְנַשֶה(causing to forget 잊게 만드는)를 낳고 “나의 모든 고난과 아버지의 집 생각을 잊었다”고 고백했고, 에브라임אֶפְרָיִם(double fruitful 창성케 됨)을 낳고 ‘나의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창41:51-52). 에브라임은 후대에 북이스라엘의 남은 지파들의 대표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북이스라엘을 에브라임과 동일시하고, 에브라임을 곧 북이스라엘이라 여깁니다(호13:1).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열방으로 흩을 때 혼혈 정책으로 에브라임이 이방 세계로 혼합되고 흡수되게 하였습니다. 이후 에브라임은 이방인처럼 되어 버렸고 이방인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에브라임אֶפְרָיִם의 파라פָּרָה는 ‘열매를 맺다’라는 뜻이고 이 단어가 히필동사(사역동사)로 쓰일 때 히프라הִפְרָה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히프라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접붙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열방으로 흩어진 에브라임은 이방 세계로 접붙여져서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은 온 열방의 이방인들을 다시 유대인의 가지에 접붙여 하나 되게 할 계획(요4:22, 이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남이니라)을 이미 세우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가족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6-17
여기서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혈통인 ‘브네이 이스라엘 בְני יִשְרָאֵל’로서 유대인과 연합된 하베로חֲבֵרו를 의미합니다.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로서 이스라엘 온 족속(콜 베이트 이스라엘 하베로 כָל-בֵּית יִשְׂרָאֵל חֲבֵרו)’은 온 열방으로 흩어져 흡수 동화되어 사실상 이방인이 되어버린 북이스라엘과 그들에게 연합되어 하베로חֲבֵרו, 한 족속이 된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혈통을 통한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혈통을 통하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들어온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가운데 접붙임 되어 이스라엘 가족 안으로 들어온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 ‘막대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쯔עֵץ인데 이것은 ‘나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나무와 이방인의 나무를 에스겔의 손으로 서로 합하였을 때 두 나무가 하나로 붙어 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두 나무를 서로 연합하여’에서 연합하여는 ‘카라브קָרַב’입니다. 여기서 코르반קָרְבָּן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코르반’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기 위해 드리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두 나무를 ‘카라브’ 하라는 것은 그저 두 나무를 가까이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 나무가 저 나무에 들어가게 하고 저 나무가 이 나무에 들어가게 하여 완전히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입니다. 접붙임의 과정은 잘라내고 도려내는 아픔과 접붙임이 성공하기 위한 불안하고 어렵고 힘든 시간들의 과정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연합에는 서로의 희생이 따릅니다.
로마서 11:17-24에서 참 올리브나무는 유다의 나무와 같고 돌 올리브나무는 에브라임 나무와 같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이방인 돌 올리브나무의 가지가 참 올리브나무의 꺾여져 나간 자리에 접붙임 되어 참 올리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원가지가 꺾여 나간 이유는 이방인이 접붙임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때가 되어 꺾여 나간 원가지들도 믿게 되면 그 사이에 크게 자란 원 나무에 다시 접붙여져서 한 나무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에스겔 37장을 본문으로 엡2장을 풀어가면서 15절에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라고 말합니다. 에스겔의 손에서 유대인 나무와 에브라임 나무가 하나됨은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루게 될 ‘한 새 사람(One New Man)’ 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계획을 요셉의 삶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유다가 형제들을 이끌고 요셉에게 감으로써 아버지를 모신 온전한 한 가족이 회복된 것은 마지막 때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통해 인류 구원 드라마의 절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의 큰 나무, 한 새 사람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실 때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한 것이었고 이것은 요셉의 꿈을 통해 비추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향한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