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하예이 사라
חַיֵּי שָרָה
사라의 일생
파라샤 Genesis (창) 23:1-25:18
하프타라 1 Kings (왕상) 1:1-31
브리트 하다샤 Matthew (마) 1:1-17 / John (요) 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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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믿음의 여인의 삶
사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향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했고(창12:11) 이집트 왕이나 그랄 왕 아비멜렉의 눈에도 한 번에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75세에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과 10살 차이나는 사라의 나이는 이미 65세였습니다. 65세의 나이에 이집트 왕에게 그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고 이삭을 낳기 전에는 90세가 다 된 나이였음에도 사라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눈에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단순히 외모적으로만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두 번이나 곤란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남편 아브라함의 말에 순종한 희생적이며 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있었어도 남편을 ‘주’라 부르는 겸손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한결같이 함께 하였으며 약속의 혈통을 지켜내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결단력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내적인 성품이 그녀를 더욱 가치있고 빛나게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라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마음에 숨은 사람(hidden person of the heart) 즉, 속사람이 온유하고 안정된 영으로(gentle and quiet spirit) 단장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벧전3:4). 그리고 그렇게 단장된 성품과 외모로 남편에게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하면서 어떤 놀랄 말한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벧전3:5-6). 그래서 썩을 장신구가 아닌 썩지 않는 내적 성품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인들은 사라와 같이 될 것이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사라는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통해 고결함과 위엄을 나타내었고 가정의 질서를 지키면서 남편에게 완전히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도 나타내었습니다. 사라의 속사람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습니다.
온유하고 침착한, 안정된 영을 가진 여인 사라는 결단력 있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았으며 어려운 상황에 쉽게 들레지 않으면서 남편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그것을 통해 가정의 재산을 확장하고 지키는 한 가문의 훌륭한 리더이자 어머니였습니다. 믿음으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자궁에서 아들 이삭을 낳아 자신의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달려간 사라의 일생은 모든 믿음의 여정을 나아가는 여인들의 분명한 모델이 됩니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겸손하게 따랐기 때문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가계가 지켜지고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사라가 조금이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남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르지 않았다면 아브라함과 그 가정의 믿음의 여정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라의 온유하고 안정된 영, 그리고 겸손함은 그녀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가정을 지키고, 가꾸고, 생명을 증가시키는 아내, 어머니의 역할은 믿음의 유업이 이어 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썩을 육체를 가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닌 숨겨진 속 사람(hidden person of the heart)이 온유하고 안정된 영으로 단장되는 아름다운 여인이 사라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범입니다.
사라는 127세에 죽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사라도 남편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떠난 여정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녀도 남편처럼 여호와를 향한 믿음과 또 남편을 향한 신뢰와 순종으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은 쉽지 않은 나그네의 삶, 순종의 삶에 늘 옆에 함께 해주었던 믿음의 동반자 아내의 묘지를 위해 큰 대가 지불을 하고 헤브론 막벨라 굴을 구입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어떤 모습의 아내였을까요? 그 땅의 민족들로부터 인정받고(헷 족속, 아비멜렉) 강력한 군사력도 지닌 아브라함, 많은 부와 사람을 거느린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사라는 집안을 지혜롭게 잘 다스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 속여 곤경에 빠질 뻔했을 때 사라는 남편과 가정,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순종을 선택합니다. 사라의 남편을 향한 신뢰와 순종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심으로 오히려 더 큰 부를 아브라함에게 가져오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잘 훈련된 남자 318명을 데리고 떠났을 때도 혼자 그 많은 하인과 동물 떼를 지도하며 담대하게 집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가족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모습이 보일 때는(하갈이 사라를 무시할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할 때) 과감하게 잘라내 버리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다리던 약속의 아들을 믿음으로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돌려 달라고 했을 때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그 아들을 내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모든 여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또한 남편을 향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사라의 삶은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믿음으로 가정을 지켰고,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를 낳았으며, 믿음으로 자녀를 죽기까지 하나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사라는 단순히 한 사람의 아내인 사래שָרַי에서 여러 민족을 이루는 높고 존귀한 여자인 사라שָרָה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강인한 여성 리더십이었습니다. 또한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아들 이삭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잘 가르친 어머니였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 리더십을 강조할 때 여성의 순종은 미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더 내세우고, 사회에서 위치를 가지고, 자기 것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여성의 리더십은 순종을 통해 가장家長의 권위를 존중함으로 가정을 보호하고 넉넉함과 여유를 가지고 나누며 강한 결단력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 주고 자녀에게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할이 다른 것이지 높고 낮은 위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정 안에서 여성에게 주신 리더십은 질서를 지키고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과 역할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분명 희생과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희생과 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따라오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희생과 대가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자라게 합니다. 믿음의 삶은 희생과 대가를 지나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나그네의 삶
헽חֵת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렵게 만들고, 공포를 주어 낙심하게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헷 족속이 공포스럽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존재일지라도 아브라함은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힙니다(창23:7,12). 그리고 겸손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23:4)
자신을 굽혀 겸손하게 ‘나그네’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을 향해 헷 족속도 그를 인정합니다.
“내 주여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창23:6,11)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지도력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나씨נָשִׂיא, 통치자, 왕자)라고 말함으로 그의 영적인 권위도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상대를 존중해 주었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상대방의 모습이 강퍅하고 압제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을 가진 헷 족속이었을지라도 그 땅에서 먼저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는 권위를 먼저 인정해 주고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그 족속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한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가진 아브라함의 리더십은 ‘겸손과 존중’이었습니다.
부와 능력과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였지만 아브라함은 헷족속 앞에서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분명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지만 아직은 현실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땅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약속받은 땅이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차지하려고 갈등의 분위기를 만들거나 자신의 부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역할과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창15:8). 그때 하나님은 횃불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만에 큰 재물을 가지고 이방 나라의 압제에서부터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은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 그러나 아브라함의 때에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이 땅이 주어진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의 중간 지점을 어떤 입장으로 견지해 나가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그 믿음은 현실 가운데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미 주어졌다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현실 속에서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지만 장차 올 것을 바라보았기에 나그네이자, 거류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취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때에 해야 할 일이 있고, 다음 자손의 때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 있음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장차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뻐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이 땅에서 외국인이고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습니다(히11:13-14).
한 세대 혹은 몇 세대 동안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 큰 스케일의 비전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반드시 나의 때에 이루어 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커다란 비전을 이루어 내기 위해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합니다. 결국 자신의 의에 지치든지 또는 반대로 도취되어 교만에 빠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비전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주어진 분량과 역할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비전을 보여주실 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 때에 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나의 역할까지 감당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할 일입니다.
믿음의 동반자요, 하나님의 킹덤을 향해 나아가는 파트너이자 자신을 주로 섬기고 순종했던 아름다운 아내 사라의 죽음에 아브라함은 깊이 애통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그 모든 것들이 잘 유지되고 지켜질 수 있도록 도운 현숙하고 강한 아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녀를 위한 무덤이자 자손을 위한 땅을 사기로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녀가 부활할 것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그녀를 위한 무덤이며 곧 자신의 무덤이 될 곳에 그리고 곧 약속의 자녀들이 차지하게 될 땅이 될 곳에 그동안 모아온 대부분의 재산을 모아 은 400쉐켈을 지불을 하고 막벨라 굴을 구입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계기로 약속의 땅 헤브론에 매장지인 막벨라 밭과 굴을 큰 대가를 지불하여 얻음으로 그 무덤에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될32 사라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서 아내 사라를 위한, 그리고 자손을 위한 땅을 살 때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나그네’라는 것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그들 앞에 자신을 굽히고 겸손하고 정중하게 그들의 땅을 살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이미 그 땅의 족속들의 눈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였지만(창23:6) 그는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진행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족속을 존중하고 그 족속들은 합법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땅의 일부를 내어줍니다. 이로써 사라를 위한, 그리고 자손을 위한 약속의 땅의 일부가 아브라함의 것이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부부, 이삭의 부부 그리고 야곱의 부부 믿음의 3대가 아브라함이 소유하게 된 매장지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됩니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의 족장들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그들의 믿음에 대한 증거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과 죽음을 통해서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뤄낸 믿음의 여인 사라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자녀에게로 이어지는 믿음의 유업
사라를 위한 장례를 마치고 약 3년이 지난 어느 날 아브라함은 그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아람 나하라임(אֲרַם נַהֲרַיִם 두 강 사이의 아람지역 즉 북서쪽 메소포타미아 하란 근처)에 있는 나홀의 성으로 보내며 그 집에서 주인의 아들인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하라고 보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실하게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며 동행했던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신뢰하는 삶을 가까이에서 보아 왔고 그도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삶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엘리에셀은 나홀 성 밖 우물 곁에 도착해서, 한 소녀에게 물을 요청할 때 그 소녀가 엘리에셀 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낙타에게까지도 물을 모두 공급해 주게 되면 그가 이삭을 위해 정하신 아내로 알겠다고 기도합니다(창24:13-14). 엘리에셀의 기도가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옵니다. 그녀가 우물에 내려가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올라올 때 엘리에셀이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가서 항아리의 물을 조금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녀는 친절하게 “나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하게 항아리를 내려 물을 충분히 마시게 한 후 항아리의 물을 낙타를 위하여서 구유에 붓고 열 마리의 낙타를 위해 부족한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항아리를 들고 다시 우물로 달려 내려가 열 마리의 낙타들이 다 물을 마시도록 부지런하게 움직입니다. 리브가는 어둑해진 저녁에 성 밖 우물 밑에서 자신에게 급히 달려와 스스로 우물에서 물을 마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항아리의 물을 요청하는 낯선 남자를 향하여 “나의 주여 마시소서”라며 친절을 베풉니다. 그리고 엘리에셀과 그 따르는 자들과 열 마리의 낙타들까지 다 마시게 하기 위해서 항아리로 우물 물을 퍼 올려주는 부지런함과 넉넉함과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신부감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그런 리브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놀라워합니다. 엘리에셀은 모든 동물에게까지 물을 마시게 해준 리브가의 넉넉함과 강인함,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리브가의 모습을 보며 그의 여주인 사라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열흘간 더 있다 떠나라고 해도 당장 돌아가겠다는 엘리에셀을 따라 낯선 땅으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삭에게 가기로 하는 과감한 결단력까지 갖춘 리브가는 믿음의 유업을 이삭과 함께 이어가기에 충분히 예비된 신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북서쪽 메소포타미아인 아람 나하라임에 살고 있는 나홀이 밀가에게서 여덟 아들을 낳았고 막내 아들인 브두엘은 라반과 리브가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창22:20-23). 브두엘בְתוּאֵל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이며 ‘하나님이 파괴하신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이며 아브라함의 동생이었던 나홀이 우상들로 가득하여 영적 흑암이 덮인 세속 도시 우르에서 신앙을 회복하여 경건하게 살려 했던 신앙의 고백을 그 아들의 이름 브두엘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운영하던 ‘우상 공장’의 우상들을 불태워 버린 사건으로 망명을 해야 하는 압박 받는 도시 분위기33 속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했을 그 때 나홀은 같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나홀도 ‘아람 나하라임’ 지역으로 이주하여 나홀성을 쌓고 경건하게 살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브두엘과 밀가와 라반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하여서 리브가가 자란 가족의 신앙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가족의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리브가를 향해 나홀성의 가족들은 예언적 축복을 해줍니다.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리브가רִבְקָה는 ‘꽉 묶어서 붙들어 매다, 달라붙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운 세상에서 비록 약 1,000km에 달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지만 리브가의 믿음의 결단을 통해 신앙의 유산을 잃지 않고 붙들며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가문과 나홀, 브두엘의 가문이 서로 꽉 묶여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세대인 야곱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도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오라비 라반에게로 보내어 두 가문의 혈통을 다시 잇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이 태어나게 하고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기초가 놓이게 되도록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장막에서 이삭을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삭에게 나그네의 삶을 시작하게 된 이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취하기까지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믿음이 끊어지지 않고 그 유업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하였기에 이삭도 양팔과 양다리가 뒤로 묶인 채 ‘제단 위에 올려지는 순종’을 하였고,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리고 왔을 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신뢰함으로 그녀를 어머니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렇게 사라의 장막은 리브가의 장막이 되었고, 그녀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펼치시는 놀라운 계획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삭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림과 리브가의 결단력 있는 순종으로 또 하나의 믿음의 가정이 탄생하고, 신앙의 유업이 이어지게 됩니다. 리브가는 그녀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유업을 꽉 붙들고, 또 그것이 자녀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킹덤의 유업은 그것을 꽉 붙든 자들을 통해 이어지고 확장됩니다. 꽉 붙들 수 있는 힘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사건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로 말합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7)
여기서 ‘얻으리라’ 또는 ‘차지하리라’라고 번역된 야라쉬יָרַש는 ‘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로부터 그 소유권을 빼앗아 와서 차지하고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씨를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의 사역’이기도 하며 ‘모든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야라쉬의 유드‘י’는 ‘손’, 레쉬‘ר’는 ‘머리’, 쉰‘ש’은 ‘파쇄하다’라는 의미로 야라쉬는 손으로 머리를 으깨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씨인 기름부음 받은 자의 사역을 잘 표현해 주는 동사입니다.
창22:17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전한 말은 아브라함을 통한 자손의 번성과 그 자손을 통해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메시아가 탄생할 것과 그 메시아가 대적 원수가 차지하고 있는 것을 빼앗아와서 다시 소유권을 취하여 차지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여자의 씨’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그 가문의 신앙 유업이었는데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기대가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차지(야라쉬) 하리라”라는 문장과 야라쉬라는 동사를 통하여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이어서 22장의 뒷부분은 리브가의 족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23장에서는 사라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24장에서는 리브가와 이삭이 만나 결혼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여자의 씨에 대한 가문의 전통과 거룩한 혈통을 통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기대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사의 입장에서 이삭의 혼사를 가정의 가장 큰일로 다루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일한 믿음의 전승을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과 그의 집안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동사 야라쉬는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문장에서도 계속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야라쉬는 원래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영역이지만 현재 대적 원수에게 빼앗긴 상태가 된 영역을 기름 부음 받은 권세를 사용하여서 다시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원수가 차지하고 있는 성문을 파쇄하고 그 성을 되찾아와서 차지한 뒤 그 전리품을 형제들과 나누는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이것이 모든 영역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며 또한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야라쉬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갔던 인간이 다시 그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원수의 성문을 파쇄하고 빼앗아 되찾고 소유하여 상속받게 되는 종말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메시아 예슈아께서 유다의 사자이자 용맹한 전사로서 앞장서시며 흰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입성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뒤를 따르며 그분의 야라쉬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승전가를 부르며 오래 저장하였던 6,000년 된 맑은 포도주를 다 함께 마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슈아께서 모든 이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그분의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여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분의 보좌 앞에서 각자가 받을 상급의 몫을 받고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