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th 톨레도트
תּוֹלְדת
세대들
파라샤 Genesis (창) 25:19-28:9
하프타라 Malachi (말) 1:1-2:7
브리트 하다샤 Romans (롬) 9:1-13 / Matthew (마) 10: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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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따르는 자, 하나님을 따르는 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롬9:12)
큰 자, 라브רַב는 많고, 힘이 세고,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어린 자, 짜아르צָעַר는 작고, 의미 없고, 숫자적으로도 적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무언가 자신을 지탱해 줄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고, 힘이 없고, 존재감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연약하고 작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지 않으셨고,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나라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따르는 사람을(에서) 미워하시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며 붙들고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을(야곱) 사랑하셨습니다(말1:2-3, 롬9:13).
들로 나아가 사냥을 통해 세상을 가지려 했던 에서와 달리 야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장막에 앉아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과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에서는 ‘철저한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막에 거하며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익숙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야다יָדַע라는 단어로 쓰였는데 이는 ‘알다’라는 뜻입니다. 에서는 들(싸데 שָׂדֶה)과 사냥(짜이드 צַיִד)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창25:27-28). ‘들’은 ‘세상’을 뜻합니다. ‘사냥’은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에서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힘까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막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용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탐תָם은 ‘완전한, 흠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정상적인, 완성된’이란 뜻을 가집니다. 즉, 야곱은 그냥 조용한 사람만이 아니었고, 앞선 세대의 사람들과 함께 장막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그들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이었고 믿음의 유업을 이어갈 자로서 온전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의 뱃속에 있던 두 국민은 하나님의 킹덤과 세상 나라를 의미합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킹덤의 계보와 세상의 계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었고 들보다 장막을 선택한 자에게 하나님의 유업이 흘러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역사는 늘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대립하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큰 자(라브רַב)가 어린 자(짜아르צָעַר)를 섬기리라고 하신 것처럼 다수가 오히려 적은 자를 섬기도록 하십니다. 왜냐하면 ‘적은 자, 작은 자’는 철저히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힘 있는 자를 자랑하고, 그런 자를 높이 세우지만 하나님은 작은 자를 세우십니다. 작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더 갈망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5:3).
리브가의 믿음과 결단 –
약속의 자녀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유업
리브가는 왜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했을까요? 장막에 거하며 어머니와 친밀했던 야곱이 더 예뻤기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편애였을까요? 리브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한 예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리브가가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결혼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의 가정 안에 있는 신앙의 유업을 믿음으로 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이미 그들의 가문 안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신앙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남편 이삭과 자신의 시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알았고, 자신의 가족에게 주어진 사명과 축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자신의 가계 안에서 태어나야 할 자손 중에 왕이 있음을 알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 아래 있는 선택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리브가는 시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먼저 태어난 장자 이스마엘이 아니라 왜 남편 이삭이 선택받았는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믿음의 계보를 통해 흘러내려갑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을 정확하게 들은 사람은 이삭이 아니라 리브가였습니다. 리브가의 마음에 뿌려진 예언의 씨앗을 그녀는 마음에 담고 물을 주고 자라게 하였습니다.
리브가는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에서의 행동들은 리브가의 마음을 근심하게 할 뿐이었습니다창26:35. 리브가는 이 중차대한 가계의 사명과 축복의 흐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점점 더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막에서 선조들로부터 역사를 배우고 신앙의 유업을 전해 받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는 야곱의 마음에 자라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의 유업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언의 말씀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유업이 마땅히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 이삭이 노년에 눈이 어두워져 분별을 잃고 관습에 따라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려던 것을 야곱에게 흘러가도록 결단하고 행동합니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았고, 그로부터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 과감하게 떠나보내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이 장막에 거하며 말씀을 사랑하고 몸과 마음이 온전하여 흠이 없던(탐תָּם) 아들인 야곱에게로 흘러가야 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과감히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결단하고 행동을 취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먼저 생각하는 자와 그럼에도 사람의 뜻과 관습을 따르는 자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인간의 선호도와 달리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반드시 행하십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섬길 것이다’라는 뜻이 아님을 리브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아들에게 유업이 흘러가도록 선택한 리브가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도록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해오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양자 됨, 영광, 언약들, 율법을 세우신 것, 예배와 약속들
하나님이 레위지파와 세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고, 이 언약을 레위지파에게 주신 이유는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입니다(말2:5). ‘레위’의 이름의 뜻은 ‘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연합된 자,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유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분별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잠9:10, 전12:13).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롬9:1-2). 그것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롬9: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 영광과 언약들,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사람의 혈통을 통해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롬9:5. 이런 엄청난 축복과 유업은 육신의 자녀(이스마엘이나 에서)에게로가 아닌 약속의 자녀(이삭과 야곱)에게로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도, 바울도 깊이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연할할 수 있는 언약을 가진 레위 지파도, 제사장들도, 약속의 씨의 유업을 가진 야곱의 족속인 이스라엘도 모두 그 언약을 경히 여기고 멸시하고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도 위대하시도다”(말1:5)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이 이방 세계를 향하여서 관심을 돌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두 번이나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라고 강조하십니다(말1:11). 먼저는 더러운 떡을 드리고 눈먼 희생 제물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골라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공경하지 않는 제사장들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기로 결단하십니다. 대신 이방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경외하는 자들이 각처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을 받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또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여전히 흠 있는 것으로 속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언급하시며 그러한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나는 위대한 임금이요 너희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지만 내 이름이 열방 중에서는 경외함을 받게 되리라”고 하시면서 이방인을 향하여 눈을 돌리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그들 마음에 두지 않았고, 옳은 길에서 떠나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이방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옳은 길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는 자에게 그 유업이 흘러갈 수 있도록 축복의 문(메아 쉐아림מֵאָה שְׁעָרִ ים)들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가질 수 있는 자의 자격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이삭과 같은 순종과, 야곱과 같이 끝까지 믿음으로 붙잡는 것(아카브עָקַב, 야곱)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일정기간 예슈아의 태어남을 위해 혈통을 보호하셨지만 예슈아로 인해 십자가의 구속이 완전히 이뤄진 순간 하나님의 킹덤의 유업과 약속의 계보는 믿음을 따라 예슈아 안으로 들어온 자들에게로(롬9:8) 흘러갔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킹덤의 계보와 세상의 계보 사이의 치열한 전쟁가운데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들의 계보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세상의 계보안에 있는 자들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큰 자, 많은 자가 어린 자, 적은 자를 섬기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들을 사랑하는 자보다 장막에 앉아 하나님의 킹덤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