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th 봐이쉴라흐

וַיִּשְלַח

그리고 그가 보냈다

파라샤 Genesis (창) 32:3-36:43

하프타라 Obadiah (옵)1:1-21

브리트 하다샤 Hebrews (히) 11:11-20 / Matthew (마)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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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함몰되어 있는 나를 극복하게 하는 얍복(יַבק 비워진)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종들을 보냅니다(창32:3). 야곱이 먼저 앞서 보낸 종들은 야곱에게 돌아와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32:6).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종들은 “주인의 형 에서가 당신을 죽이려고 400명을 데리고 오더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더이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만나다’라는 히브리어는 카라קָרָא라는 단어로 쓰였는데 이 단어는 ‘호의적으로 만나다’ 혹은 ‘적대적으로 만나다’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 단어만을 통해서는 에서가 야곱을 맞이하려고 오는 것인지, 죽이려고 오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종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심히 두렵고 답답해합니다(창32:7).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오던 대로 에서가 20년 동안 야곱을 향해 이를 갈고 있다가 돌아온다고 하니까 분노가 일어나서 없애려고 장정을 400명이나 이끌고 온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20년 사이 에서는 그의 힘과 능력을 통해 땅을 소유하고 많은 사람을 이끄는 한 족속의 두령으로서 마음이 어느 정도는 누그러져 동생인 야곱을 그저 보러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들의 보고만을 가지고는 에서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고를 듣자마자 야곱의 마음이 심히 두렵고 답답한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왜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해했을까요? 야곱이 아직까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이 복잡해졌기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미리 자기의 수를 써서 재산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자녀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수비벽을 만들어 보기도 하며, 형을 위한 예물도 준비해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라 행동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문제를 직면하게 될 때 머리가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생각보다 문제는 단순할 수도 있고 상황도 이미 단순해졌을 수도 있는데 내가 스스로 그 문제에 함몰되어 복잡한 수를 자꾸 생각해 보기 때문에 문제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문제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의 수를 생각하고 자기 방법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합니다. 정확하게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문제 자체를 보지 말고 그 문제에 함몰되어 있는 나를 돌아보고 철저하게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의 방법론, 생각, 감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얍복(비워진)에 홀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 우리를 철저히 다루십니다. 그래서 내 안의 죄와 교만, 인간적인 방법론들을 조명하기 위해 나와 비슷한 혹은 더한 사람을 붙이셔서 그 사람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혹, 내가 그 영역을 해결하지 못하면 잠시 보류하실 수는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같은 상황 혹은 비슷한 사람에게 다시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넘어야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와 비슷한 라반을 통해 자신을 돌아봄으로 혹독한 다룸을 받았고, 이제는 속여서 하나님의 축복권을 가져온 형 앞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으로 더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걸으려는 우리의 몸부림을 보시지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가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믿음으로 반응하는가에 집중하시고 친히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붙잡는 자를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은 모두 넘지 못하고 계속 걸려 넘어지거나 혹은 보류 중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피하고 덮어두면 될 것이라는 생각과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과 경험들을 비워야 합니다. 아프지만 고통스럽지만 도망가지 않고 그 상황으로 직면해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 직면하도록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묶여있던 사망과 어둠의 권세가 끊어지고 참 자유가 오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되는 새 사람(새로운 정체성)

야곱은 원치 않게 다시 직면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음에는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소유를 두 떼로도 나눠보고, 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 하여 예물을 구별하여 먼저 보내기도 하고, 또 아내들과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순서대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그는 결국 얍복(יַבק 비워진)에 남아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삼촌 라반으로부터 아내들도 얻고, 자녀들도 얻고, 많은 소유를 얻었지만 죽음과 생명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인 그는 그의 이름대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생명을 다해 붙잡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붙잡습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자신의 것을 꽉 움켜쥐었던 야곱은 결국 그것을 비울 수(얍복) 밖에 없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얍복)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할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됩니다(프니엘פְּנִיאֵל). 그가 직면한 것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문제는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문제에 직면함을 통해 야곱은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되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라는 뜻의 이름 이스라엘을 주십니다. 이스라엘יִשְרָאֵל은 싸라שָרָה라는 단어와 엘אֵל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싸라שָרָה는 ‘힘을 가지다’라는 뜻이고 엘אֵל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힘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이겼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야곱의 생명을 건 기도에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야곱이 기도로 승리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야샤르יָשָר와 엘אֵל의 합성어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야샤르יָשָר는 ‘정직하다, 곧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정직하게, 곧게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주어진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었다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다른 애칭은 ‘여수룬יְשֻרוּן’이었습니다. 여수룬도 이스라엘과 같은 어근 야샤르에서 ‘정직한 자, 올곧은 자’라는 뜻을 가지며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야곱은 ‘뒤꿈치를 붙들고 좇아가다’라는 뜻으로 뭔가를 늘 움켜쥐던 사람이었지만 얍복나루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만 붙잡기 시작할 때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승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정직하게, 곧게 나아가는 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던 장소를 브니엘(프니엘פְּנִיאֵל)이라 불렀습니다. 프니엘은 방향을 ‘돌리다, 직면하다(turn, face)’라는 뜻의 파나פָּנָה에서 나온 단어로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여 돌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즉, 하나님과 직면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움켜쥐다)은 얍복(얍보크)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얼굴을 직면하였을 때(프니엘) 승리하였고, 정체성이 바뀌게 되었습니다(이스라엘). 우리의 자아가 비워지고 파쇄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로 인하여 새로운 ‘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יִשְרָאֵל의 또 다른 의미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고백에서 아래와 같이 유추되기도 합니다. 이쉬אִיש+라아רָאָה+엘אֵל 하나님을 본 사람.

에돔의 자손들, 그의 영이 뿌린 씨앗의 열매

에서는 자기의 육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한 순간에 실수를 하게 되었고 그 실수와 틈을 통해 자기 것이 되어야 할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기게 되고 맙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빼앗겨 버렸으니 에서의 마음은 얼마나 쓴 마음과 미움으로 가득찼겠습니까? 미움은 살기가 되었고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야곱을 향해 이를 갈면서 지냈으니 그의 그런 쓴 마음은 그의 자손들에게까지 흘러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의 자손인 에돔 족속들은 언제나 한결같이 야곱의 족속인 이스라엘을 미워했고 시기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마지막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큰 두 가지 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동쪽의 에돔과 이스라엘의 서쪽 해변에 있는 깃딤입니다. 깃딤은 포악을 행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해양민족들 특히 그리스와 로마를 상징합니다. 쿰란 사본에서 발견된 ‘빛들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전쟁’이라는 책에는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총 7라운드의 전쟁이 있을 것인데 이스라엘이 전멸하기 직전에 메시아가 오심으로 에돔과 깃딤이 심판 받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울 때 주님을 대적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대적하며,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자들이 모두 스스로 넘어지고 걸려지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옵1:15).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의 시나리오입니다. 만국을 벌하실 날에 큰 성 바벨론도 무너질 것이며 시온산에 오셔서 의로운 백성들을 대신하여 신원(복수)하시고 만국이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에돔의 영이 있습니다. 형제, 자매가 잘되는 것을 은근히 싫어하는 것, 잘못되면 은근히 기뻐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남아있으면 우리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철저히 에돔의 영과 가인의 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채워지길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고 괴롭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특별히 남은 자들이 환난 중에 있을 때 그것을 방관하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남은 자들을 세상에 넘겨주면서 죽게 하는 악한 자들의 행실들은 반드시 심판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의 산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세력들과 힘들은 구원받은 남은 자들 즉, 예슈아와 함께 선 성도들에 의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에서의 마음은 평생 야곱을 미워했던 것 같습니다. 에서는 야곱과 화해했지만 그 마음에 남겨진 미움의 씨앗,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것을 무시한 에서의 흐름은 자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잠시 변한 에서였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근본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한순간의 돌이킴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철저한 다루심 앞에 나를 완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에돔처럼 될 가능성이(교만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할 가능성)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회개는 한순간이 아니고 과정입니다. 성소의 등잔대(메노라מְנוֹרָה)의 재를 매일 청소해야 그을음 없이 불이 잘 타서 성소를 비출 수 있듯이 내 안에 쌓이는 재, 더러움들을 매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을 향해 행한 포학으로 인해 영원히 멸절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옵1:10). 에돔 족속은 유다 자손이 패망하던 날에 기뻐하며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제비 뽑을 때 그 이방인들과 한 패가 되어 함께 있었습니다(옵1:11). 그들은 이스라엘의 고난의 날에 그들의 입을 크게 벌리고 좋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환란을 방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고 유다 자손들이 원수를 피해 도망할 때 그들을 막고 그 남은 자들은 원수의 손에 넘기기까지 했습니다(옵1:12-14). 에돔 족속들은 철저히 이스라엘을 미워했고 더 나아가 그들의 멸망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임에도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한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정하신 만국을 벌하신 날, 심판의 날에 그들의 죄가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옵1:15-16). 그리고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서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며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옵1:21).

에돔의 교만함과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고 질투하며 형제가 잘못되면 기뻐하는 심술부리는 악한 마음은 늘 야곱의 자손들을 괴롭게 했고 이것이 그들이 영원히 심판을 받고 멸망 받는 이유가 됩니다(옵1:3,10,12). 에서가 야곱을 보고 마음을 바꿨던 그 순간이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그가 미움과 살기에서 완전히 돌아섰더라면, 에서의 자손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괴롭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형제의 잘 됨을 배 아파했고, 잘못됨을 기뻐하며 심술을 부렸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바댜 선지자를 통해, 에서의 자손인 에돔 족속이 얼마나 야곱을 향하여 포악을 저지르며 미워했는지를 지적하십니다(옵1:10). 에돔 족속의 후손인 아말렉은 늘 이스라엘을 뒤쫓아 다니며 괴롭히다가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은 이스라엘 전체를 몰살시켜 버리려 했고(에3:1,6), 에돔 족속의 후손인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2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학살시켜 버립니다(마2:16).

유업을 가진 자, 선택받은 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의 주변에는 이것을 시기하는 사탄의 움직임과 공격이 항상 함께 합니다. 오늘까지 이스라엘을 향한 열방 나라들의 시기와 미움, 이스라엘 주변에 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협은 이스라엘이 유업을 가지고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 민족을 선택하셨고, 모세를 통해 말씀을 맡기셨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민족을 통해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예슈아가 재림하셔서 예루살렘의 보좌에 좌정하시고 통치하심으로 하나님 킹덤을 완성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의 역할과 사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교회와 함께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속해있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고 순탄치 않은 일들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업과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시고 온전하게 하셔서 그분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 과정에는 씨름이 있지만 계속해서 증가하고 확장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히11:8-16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본향)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그들의 장막에서 이삭과 야곱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과 현실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넘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시험을 이겼고, 시련을 견뎠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던 하나님 나라를 같은 믿음으로 바라보며 시험과 시련을 이기면 언약의 성취, 하나님 나라의 완성 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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