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봐이크라

ויקרא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파라샤 Leviticus (레) 1:1-6:7

하프타라 Isaiah (사) 43:21-44:23

브리트 하다샤 Hebrews (히) 10:1-18 / Mark (막) 6:14-29

말씀을 누르면 성경을 읽으실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Clicking the word will take you to a Bible reading page

코르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음

출이집트 제2년 아빕 월(니산 월) 1일 새해 첫날 모세는 여호와께서 시나이 산에서 보여주신 하늘 성전의 모형(타브닡 תבנית)을 따라 땅에 하나님의 처소인 미쉬칸을 세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미쉬칸을 만들고 나니 구름이 땅에 내려와 그 회막(오헬 모에드 אהל מעד)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미쉬칸 משכן)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출 40:34-35). 이제 하나님은 땅의 처소인 성막(미쉬칸)에 머물기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머물기 시작한 성막(미쉬칸)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성막(미쉬칸 משכן)이라고 표현할 때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정하신 처소로 들어가셔서 그 안에 사시기로(쇼켄 שוכן) 작정하신 장막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회막(오헬 모에드 אהל מעד)이라고 표현할 때는 사람이 들어가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정해진 장막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쉐키나가 이 땅에 영광으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친히 머무시는 성막(미쉬칸)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매순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그분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 그분을 가까이에서 섬길 수는 없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였다는 모세조차도 그 순간 영광의 임재가 너무 거룩하고 강력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죄를 해결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봐이크라 ויקר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코르반קרבן)을 드리려거든(레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기 위해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코르반קרבן은 카라브קרב라는 동사원형에서 파생된 단어로 카라브는 ‘서로 가까이 접근하여 가까워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브קרב동사를 강조형인 피엘동사로 사용하면 키레브קירב라고 쓰이고 이는 ‘더 가까이 이끌어 데려오다’는 뜻이 되며, 이것의 수동 형태인 푸알동사 쿠라브קוּרב는 ‘더 가까이 이끌림을 받고 데려와지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코르반קרבן이라는 의미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코르반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감을 얻음’이라는 의미이고, 코르반의 이차적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더해 레위기 1:2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가까이, 더 깊이 나아오고자 하는 자는 

희생예물(제물)을 통해서 나아오라 (레1:2,진리의 집 번역)

또한 같은 동사원형에서 파생된 명사 케레브קרב는 ‘더 가까워진 곳’이라는 의미에서 ‘내면, 안쪽’이라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거리를 두고 겉으로만 만나는 관계로 지내다가 서로 가까워지게 되면 가까워진 만큼 내면과 내면이 만나면서 친밀함과 안정감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내면이 부딪쳐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투고 싸우게 되며, 이것이 개인이 아닌 민족이나 나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면 서로를 죽이기까지하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카라브קרב에서 파생된 또 다른 명사 크레브קרב는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서로의 내면과 본성에 충돌이 일어나 다투고 싸우게 되면 결국은 헤어져 거리를 두게 됩니다. 만약 서로 계속 가까이 있기로 결정한다면 둘 중에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계속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코르반의 세 번째 의미가 나옵니다. 바로 ‘희생’입니다. 둘 중에 한쪽이 손해를 봐야 더 가까워지는데 여기에도 두 가지 종류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쪽이 상대를 희생하게 하여서 즉,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해서 서로 가까워지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시작되는 우상숭배의 특징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쪽이 스스로를 희생하여서 서로 가까워지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에는 더 사랑하는 자가 희생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균형이 깨어지고 불완전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먼저 스스로 희생하심으로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가까이 품어 주셨습니다. 예슈아는 코르반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코르반이 되심으로 모든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영원하고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미쉬칸을 지으신 이유는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는 본질적인 죄인이었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이 코르반입니다. 성막(미쉬칸)의 완성 이후 모세를 부르시고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연합하기를 강렬히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 코르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손 내밀고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코르반이라는 방법을 먼저 제시해 주셨습니다. 성막(미쉬칸) 안에 이미 들어와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기(코르반)위해서, 그리고 친 히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봐이크라ויקרא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코르반 - 제사와 예배

번제 (코르반 올라 קרבן על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첫 번째 코르반(희생제물의 제사)은 번제(코르반 올라)입니다. 번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올라 עלה는 ‘위로 올라 가다, 하늘로 오르다’는 뜻으로, 연기가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는 제사장이나 경배자들에게 나눠지는 몫이 없이 ‘전체를 온전히 다 태워 올려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아낌 없이 모두 다 기쁘게 불태워 올려드리는 삶이 번제의 삶이고, 이것이 예슈아의 삶이었습니다. 나의 만족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하늘 보좌를 향해 온전히 올려드리는 번제와 같은 예배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soothing aroma)가 되는 예배입니다. 

번제의 방법으로 드리는 코르반이 다른 제사와 구별되는 특별한 점은 번제는 매일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번제단에 예물을 드려서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상번제(항상 드리는 번제, 올라 타미드עלה תמיד)로 올려드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번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의 씨를 계속 관리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불씨로 화제가 드려지고 있는 번제단에서 소제가 드려지고 또 그 위에서 화목제가 드려지며 속죄제와 속건제도 드려지면서 매일 드리는 상번제는 나머지 다른 제사들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번제의 삶은 나의 만족이 없고 나에게 남는 유익이 없어도 하나님께 100% 완전히 다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예배는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아까워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쁘게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전부 올려드리는 것의 기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즐거움, 하늘 보좌에까지 높이 들려 올려지는 영의 상태의 행복, 예수님은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즐거움이고 영원한 연합 즉, 영생의 기쁨입니다. 

소제 (코르반 민하 קרבן מנחה) 

소제(코르반 민하)는 레위기의 5대 제사 중 동물의 피 흘림이 없이 곡식을 번제단 위에 불로 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히브리어로 민하מנחה라고 하는데 높으신 분에게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다하여서 준비하여 드리는 선물, 혹은 예물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직접 경작하지 않은 야생의 소산물들을 예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삶 속에서 수고하고 정성을 다한 경작물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예의를 갖추고 올려드리는 예물이며, 그 분의 만족을 위해서 자원하여서 올려드리는 음식입니다.

화목제 (제바아흐 쉴라밈 זבח שלמים) 

제바아흐זבח는 동사 자바아흐זבח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자바아흐זבח는 ‘생명 있는 존재를 죽이다’는 의미로 자바아흐에서 파생된 제바아흐זבח는 소나 양 등을 도살하고 도축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또한 같은 동사에서 파생된 미즈베아흐 מזבח는 소나 양을 도살, 도축 하는 장소 즉, 희생제단을 의미합니다. 화목제의 쉴라밈 שלמים은 샬렘 שלם의 복수형태로 제바아흐 쉴라밈 זבח שלמים은 ‘온전한 화평들을 위한 희생제사’라는 뜻이 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과 교통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며 더불어 제사에 참여한 자들도 서로 교제를 누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이유에 따라서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제, 사랑을 더 표현하고 싶어서 자원하여 즐거운 헌신으로 드리는 자원제(또는 낙헌제), 하나님께 약속을 다짐하고 또 그 약속을 모두 이행했을 때 드리는 서원제로 구분됩니다.

화목제의 예물에서 특별한 것은 내장에 덮인 기름과 콩팥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름은 가장 좋고 풍부한 것을 의미하며, 콩팥은 감정과 마음의 자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름과 콩팥을 드리는 것은 나의 가장 좋은 것과 내 중심을 하나님 앞에 다 올려 드림으로 육과 혼의 영역을 넘어 영의 영역인 하늘의 보좌까지 나아가 그분과 깊은 교제를 누리고 친밀함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리게 되면 그 충만함으로 이웃과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속죄제(하따앝 חטאת) 

속죄제(하따앝)는 제사장, 온 회중, 족장,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범했을 때 드려야 하는 의무적인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용서하시지만 그 죄인의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묻기 위하여 동물의 피의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죄, 하따חטא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뜻으로 하나님과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히브리어 단어 나혼נכון은 ‘정확하게 들어맞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킵니다. 죄가 하나님의 의(쩨뎈)와 공도(미쉬파트)를 침범하고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과 교제, 관계에 장애가 됩니다(요일3:4). 속죄제는 죄로 인해 장애가 되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예배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속건제(아샴אשם)  

속건제(아샴)는 죄 중에서도 하나님께나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드리는 속죄제사입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동일한 방법으로 제사 드리지만 배상하는 것이 추가됩니다. 속건제(아샴אשם)는 허물이라는 뜻의 아쉬마 אשמה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물, 아쉬마אשמה는 ‘죄책감guilty’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허물(아쉬마 אשמה)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근이 되는 아샴אשם이라는 동사는 ‘건너서 밟고 침범하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의 감정을 해치고, 기분을 상하게 하고 불쾌감을 주는 것입니다. 내 안에 허물(아쉬마 אשמה)이 있으면 나를 상하게 하고 나를 죄짓게도 하지만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실족하게 합니다. 허물(아쉬마 אשמה)이 있을 때에는 자복(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다)해야 합니다(레5:5). 변명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서도 보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하나님께도 자복할 뿐 아니라 피해를 입힌 상대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하고 배상까지 했을 때 완성되는 제사입니다. 나에게 분명 허물이 있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었는데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님께만 용서를 받았으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속건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슈아는 하나님께 예물(코르반)을 드리다가도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코르반)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코르반)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3-24). 코르반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게 하는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코르반을 가지고 왔는데 형제와 화목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한 코르반이 될 수 없음을 예슈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속건제의 삶은 치러야 할 것은 정확하게 치르고 보상하도록함으로써 어떤 허물(아쉬마 אשמה)도 내 안에 남아있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배 그리고 예슈아

하나님은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로 나아가고 하늘에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 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도록 제시하여 주신 방법이 코르반의 삶이며 거룩한 삶의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예물을 가지고 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은 우리를 하늘의 영역에 초대하셔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예물(코르반)이라는 것을 매개체로 삼으셨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 도구가 바로 예물입니다. 예배의 본래 의도와 본질을 생각할 때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 예배의 회복을 통해 부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레위기의 처음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봐이크라ויקרא) 이유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면 희생제물을 통해 향기를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고 흡족하게 하고 만족시키면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난 너와 만나고 싶다’ 이것이 예배의 핵심이고 그것을 위하여 ‘너를 성결하게 하겠다’, ‘내 거룩함의 형상을 네 안에 더욱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고 목적입니다. 

이러한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심으로 모델과 본보기가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슈아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히10:12).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슈아를 의지할 때 우리의 영이 언제든지 하늘 지성소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슈아의 보혈을 의지하며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안에 하나 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섞여있는 모든 것을 분리해내고 벗겨내고 구별하여 거룩함으로 나아 가는 작업을 매일, 매번 예배 때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의 영역에 들어가 접근할 수 있도록 5대 제사를 허락하셨고, 이 제사의 실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읽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킴으로 더 풍성하게 예수님을 경험하고 하늘을 체험합니다. 토라에서 가르쳐 주신 제사를 땅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림자와 같으며 모든 것의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사 원리의 실체가 우리에게 경험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여 놓으신 모든 일에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은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담대하게 성소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새로운 길, 영생의 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매일매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즐거이 나아가야 합니다.

봐이크라 ויקרא ,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하나님은 광야의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으며(봐이크라 출3:4), 이스라엘 백성을 출이집트하여 광야로 데리고 나오신 뒤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고(봐이크라 출19:3), 시나이 산의 영광의 구름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봐이크라 출24:16). 광야의 떨 기나무 가운데서, 시나이 산에서, 그리고 구름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과 함께 거하기 위한 집, 성막(미쉬칸)을 지으시고 친히 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출40:34-35).

처음 하나님이 모세를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실 때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모세야, 모세야”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아브라함이 손발이 뒤로 묶인 채 제단 나무 위에 올려진 이삭의 목에 칼을 데어 피를 쏟으려 하던 순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고(창22:11), 아들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가려던 야곱을 두 번 부르셨으며(창46:2), 성소를 지키던 어린 사무엘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삼상3:10).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름을 두 번 부르실 때 그분은 낮은 음성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또 온 몸을 에워싸는 음성으로 부르시며 가까이 찾아오십니다. 이름을 두 번 부르시며 가까이 찾아오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깊은 사랑과 격려, 어여쁘게 여기심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려워하였지만,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사랑으로 한 번,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그들이 반드시 완수할 것이라 격려하심으로 또 한 번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직은 복음의 원수로서 대적자로 서 있을 때 주님은 하늘 보좌로부터 친히 내려오셔서 그의 이름을 “사울아, 사울아”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그 음성 역시 사도 바울을 복음의 사도로 세우시기 위해 그를 사랑하심으로, 그리고 그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무언가를 맡기실 때 그냥 맡기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과 격려로 채워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땅의 처소, 성막(미쉬칸)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자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인도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사울을 부르시고 열방의 민족들이 예슈아를 통해 구원받고 아버지께로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인도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며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과 역할을 끝까지 잘 완수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