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타즈리아

תזריע

임신

파라샤 Leviticus (레) 12:1-13:59

하프타라 2 Kings (왕하) 4:42-5:19

브리트 하다샤 Luke (눅) 7:18-35 / Luke (눅) 22:1-13

말씀을 누르면 성경을 읽으실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Clicking the word will take you to a Bible reading page

여인의 출산과 여인의 후손

몸의 정결함은 생각과 마음, 곧 혼의 정결함을 가져오고 몸과 혼의 정결은 영을 보호합니다. 영, 혼, 육의 정결은 우리의 생명뿐 아니라 영생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곧 이 땅에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고, 이 땅에서 출생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인이 아이를 출산한 뒤 몸을 정결하게 함으로써 여인의 몸도 보호하고, 이제 막 이 땅에서 생명을 시작하게 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출산 뒤 여인의 몸의 정결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이를 낳을 때 여인들은 온 몸의 뼈와 마디가 열리고 아이가 나오는 산도도 열리면서 많은 피를 쏟습니다. 몸이 열리면서 여인들은 생명을 낳지만, 동시에 열린 곳을 통해 더러운 균에 감염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깁니다. 출산 이후에도 한 동안 산도가 열려있는 상태로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피를 흘리는 상태를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상태는 감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린 곳을 통해 몸이 감염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출산으로 인해 쏟은 피가 몸 안에서 새롭게 형성될 수 있도록 일정 기간동안 다른 것과 접촉하지 않는 보호의 시간을 보내도록 명하십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은 여인을 보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새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보호 기간이 지나면 생명을 출산한 여인과 출생한 아이는 자신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번제와 속죄제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정결(거룩)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출산한 여인이 열린 산도를 통해 흐르는 피로 감염되지 않고 몸을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은혜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생명과 축복입니다.

‘임신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라הרה입니다. 하지만 레위기 12:2에서 ‘여자가 임신할 것이다’는 타하레תהרה가 아닌 타즈리아תזריע로 쓰여서 자라זרע동사로 여자의 임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일반적인 상황에는 쓰이지 않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자라זרע는 ‘씨를 뿌리다’는 의미로 창세기 1:15에서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을 때 쓰인 단어입니다. 여인의 후손이란 여인의 씨를 의미하고, 여인의 씨는 곧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다 아담의 씨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레위기 12:2에서 “여인이 임신하여(타즈리아תזריע) 남자 아이를 낳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본문에서 여인의 임신을 단순히 아이를 가진 것(하라)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씨를 여인(마리아)이 잉태하여 메시아(예슈아)를 낳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이 결국 여인의 씨를 통해 뱀(사탄)의 머리를 쳐서 상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자라זרע라는 단어를 통해 레위기 12:2에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을 때도 자라זרע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이 아브라함의 씨가 곧 메시아라고 하였으며(갈3:16), 다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다윗의 씨가 메시아라고 했습니다(렘33:22, 요7:42, 롬1:3, 딤후2:8). 이와 같이 씨(자라זרע)는 곧 메시아를 상징하기 때문에 레위기 12:2에서는 여자의 임신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자라זרע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여인의 씨(제라 זְֶרע)를 통해 오실 메시아에 대한 힌트를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피부의 나병

몸의 정결을 위해 하나님은 특별히 나병에 대한 규례를 주십니다. 나병은 피부에 생기는 병으로 피에 독이 쌓이면 그것이 피부로 드러나게 되면서 몸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병입니다. 나병은 처음에는 작은 피부병처럼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온 몸을 썩어 들어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부에 생기는 작은 변화라도 반드시 제사장에게 보여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받도록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피부의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병에 대한 규례를 다른 병들에 비해 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피부에 생긴 것들을 자세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이것이 나병인지 일반 피부병인지를 진단합니다.

나병은 피의 전염병이기 때문에 한 사람뿐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피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더러운 피는 전염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피부병으로 시작된 것이 공동체에 전염되어 죽음의 영향력이 공동체에 흐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철저하게 피부의 상태를 살피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몸의 겉부분에 생긴 작은 변화도 하나님이 간과하지 않도록 하신 이유는 큰 문제들은 모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에 생긴 변화, 생각과 감정에 생긴 작은 변화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께 묻고, 미리 예방하고 처방하는 것이 큰 병을 막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친히 우리 몸의 작은 질병도 치료하시고 고쳐주십니다. 우리 몸의 거룩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열쇠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함을 가장 원하십니다. 나병이 작은 피부병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몸을 썩어 들어가게 하듯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감정에 생긴 작은 쓴뿌리들을 간과하면 그것이 쌓여서 생명이 흐르게 하는 피에 독소가 되고, 독소가 색점으로 드러나 우묵하게 되면 결국 나병처럼 우리 마음을 썩어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피부의 나병이(문둥병) 단순한 세균의 감염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리암이 동생 모세를 비방하며 권위에 대항했을 때 (민12:10),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쫓아가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았을 때(왕하5:27), 남유다 웃시야 왕이 성전의 불을 직접 향단에 분향하려 했을 때(대하26:19) 나병이 온 몸에 퍼졌습니다.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교만과 불순종, 권위에 대한 선을 넘었을 때 발생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계(바운더리)를 넘어서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들어와 있는 작은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행동을 하게 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하여 우리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에까지 해를 끼치는 나병과 같이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에게 나병을 내리심으로써 영적인 교만이 나병과 같은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권위를 건드리며 공동체를 전염시키는 나병입니다. 나병이 피부의 작은 색점으로부터 시작되듯이, 교만도 자기를 세우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작은 생각들과 감정으로부터 자랍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어떤 것이 섞여있는지 면밀히 체크하고 말씀을 통해 점검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순종이 곧 치유의 길

나병 환자였던 아람 장군 나아만은 자신의 치유를 위해 포로로 잡혀온 어린 히브리 여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 땅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의 치유 처방책을 듣고 크게 실망합니다. 엘리사가 내려준 처방법은 나아만이 생각하고 기대한 치유의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 생각에는(왕하5:11)”이라고 말하며 엘리사의 처방책을 따르지 않고 화가 난 채로 돌아가려 합니다. ‘내 생각에는’이라는 자신이 정해 놓은 틀, 혹은 더 합리적이고 옳다고 믿는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가볍게 여기게 하며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보다 높아진 생각이며 세상을 따르는 생각입니다(고후10:5). 자기의 경험, 지식, 논리, 능력 등이 힘이 될 때 이것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생각이 됩니다. 생각은 언제나 결과를 낳으며 세상을 따르는 생각들은 결국 하나님 을 대적하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찮게 느껴진 엘리사의 제안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돌아서려 하지만 지혜로운 종들의 말을 듣고는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왕하5:14)” 순종하였고 결국 그는 완전히 치유를 받습니다. 그가 생각한대로 했다면 그는 결코 치유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의 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는 완전한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는 몸만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알고 그 삶의 모든 예배를 여호와께만 드리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왕하5:17).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면 그것이 보호이고 생명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 몸의 생명만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영을 살게 합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체험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한 것은 작은 자들의 말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그는 작은 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의 질병이 그를 듣도록 만들었습니다. 몸의 질병이 그를 겸손하게 했고 몸과 영혼이 함께 구원받게 하였습니 다.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나병처럼 문드러지고 썩어 들어간 곳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치유와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작고 연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됩니다. 세상의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도 하셨습니다(눅7:28).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작지만 그 결과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들, 일반 백성과 세리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지만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하는 자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눅7:30). 결국 지혜의 자녀들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게 됩니다(눅 7:35).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그 지혜를 아는 자녀들은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으며 스스로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작은 것이 귀하다는 지혜를 믿고 행동함으로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곧 지혜로운 자들은 말씀에 순복하며 말씀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낮은 자리로 오셨고, 작은 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일에서도 소중함을 발견하며 작은 것부터 사랑하는 사람, 그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