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th 크도쉼

קדשים

거룩

파라샤 Leviticus (레) 19:1-20:27

하프타라 Ezekiel (겔) 22:1-16 / Ezekiel (겔) 20:2-20

브리트 하다샤 Mathew (마) 5:43-48 / Mathew (마)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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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도쉼 - 구별됨과 섞임

“너희는 거룩하라(크도쉼קדשׁים)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카도쉬קדוֹשׁ)이니라.” (레19:2)

하나님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우리가 관계 있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십니다. 거룩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다 각각 생김새가 다르고 역할이 다르며 목적이 다릅니다. 각 사람의 Original design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도 거룩한 존재이며 거룩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헬라적인 의미에서 거룩하다는 ‘영적이고 성스럽다’는 의미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차적인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거룩, 카도쉬קדוֹשׁ의 기본 개념은 ‘독특하다unique, 고유하다, 특별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모두 특별함 special, 독특함unique, 고유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고유함을 부여하시고 거룩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을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나 자신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나 자신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섞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구별됨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거룩’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레위기 19:19-22에서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중에 세 가지 종류의 섞임 ‘동물교합, 식물교합, 옷감교합’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섞이면 거룩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함과 독특함을 지키는 것이고, 각자의 고유함을 간직한 채 함께 하는 것이 조화이고 연합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질투하고 자기의 고유함을 잃어버리면 섞임이 생겨버립니다. 혼잡한 섞임은 거룩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고유함을 주신 이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것과는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아를 찾아가고 참된 나를 발견하며 하나님이 나를 설계하신 그 뜻대로 살면 그것이 곧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류의 인구 70억 가운데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같은 외모와 몸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각자의 고유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모습이 구별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는 다르게 사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것이 분리입니다. 이것이 거룩에 분리와 구별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거듭 “너희는(이스라엘)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내가 이스라엘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해서 독특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구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모든 영역에서 다르게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르게 행동할 때 더 성결하고 깨끗하고 바르게 되려는 것이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실 때는 ‘너의 존재가 독특하고 특별하게 지어졌으니 다른 것과 섞이지 말고 너의 고유함을 잘 지키고 너가 지어진 목적대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잃어버리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사람이 그 우상의 권위 밑으로 끌려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영향력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우상에게 나를 맡기고 우상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통제와 조종 아래서 나의 고유함과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 우상의 권위 아래로 내 존재의 가치가 자리매김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숭배가 나의 거룩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 앞에서 예배하고 경배할 때 나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리고 온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권위 아래로 내 존재의 가치가 자리매김되어 존귀하고 가치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찾게 됩니다. 이것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고유의 영역을 지키는 것, 이것이 거룩이며 거룩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함을 찾기 시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쩨뎈צֶדֶק)가 다시 세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 때 우리는 바른 판단(미쉬파트מִשְׁפָָט)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질서안으로 정렬되고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더 누리게 됩니다(마6:33).

거룩함의 두 가지 축(부모 경외와 안식일)

첫째, 부모를 경외하라

레위기 19:2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으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위해 우상숭배보다도(19:4) 예배보다도(19:5-8) 더 앞서 부모 경외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19:3).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권위 질서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과 신뢰함을 배우는 기초가 됩니다.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인 야레ירא를 사용하셨습니다. 야레ירא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공포에 의한 두려움이 아니라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상대를 높여드리고 존중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에는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분과 깊은 사귐을 가지며 친밀해질수록 그분의 성품에 놀라고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압도되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과 친밀합니다. 그러므로 ‘경외하다’는 말에는 깊은 친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경외함을 가지고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모님과 가장 깊은 친밀함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두려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통해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는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배우는 통로입니다. 권위는 또한 질서입니다. 권위를 잘 배운 사람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질서와 규모와 한계뿐만 아니라 그 권위 아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안정적인 지혜로움이 있습니다.

예슈아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이 코르반קרבן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라고 핑계함으로 부모에게는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막7:11). 부모를 경외함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중요하고 합당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 이 시대에 인간 관계와 삶의 예배의 기초인 부모 경외함을 배우는 것이 모든 다른 것들의 회복을 가져오게 할 핵심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슈아의 재림 직전에 엘리야의 영과 엘리야의 능력을 받아서 사역하게 될 자들이 가져오게 될 회복의 주제입니다. 이 회복을 통해서 엘리야들은 다시 오시는 메시아와 오게 될 메시아 왕국을 맞이할 백성들이 되도록 교회와 이스라엘을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눅1:17, 말4:5-6).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아버지들의 마음이 거스르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되며, 자녀들의 마음이 그들의 의로운 아버지들의 지혜로 돌아오게 되어 부모와 자녀에게 회개와 대각성을 통한 회복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회복, 무너진 권위 구조들의 회복은 마지막 때 부흥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둘째,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거룩함의 두 가지 축은 부모 경외와 안식일입니다. 부모 경외가 모든 인간 관계의 기초라면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입니다. 인간 관계가 공간적인 바운더리라면 안식일은 시간적인 바운더리입니다. 샤밭이라는 시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관계의 고유함이 지켜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곱째 날을 주중의 6일과는 구별된 날로써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천지창조와 속량의 언약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는데 있습니다.

6일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갖추어지는 시간을 보낸 후 일곱째 날에 그 완성 안에서 안식을 누리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6일 동안은 너희가 수고하지만 일곱째 날에는 너희의 수고를 멈추고 나의 안식으로 들어와서 쉼과 멈춤을 연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안식을 준수하시는 이유는 그 정한 날에 그의 백성과 함께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샤밭의 이러한 개념은 다른 모든 절기(모아딤מוֹעֲדים)의 기초가 됩니다. 6천 년 동안은 인간에게 맡겨진 시간으로써 인간이 수고하는 시간들이지만, 제7천 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와서 그 안식을 땅에서 천년 동안 누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해 셋팅해 놓으신 7천 년의 모든 인류 역사가 마치고 제8일에 즉, 7001 년 부터 시작되는 제8천 년의 시작에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선포와 함께 첫 창조에 속한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처음 것들은 지나가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피조물에 속한 것들만 남아서 영존하게 되는 영원이 시작될 것입니다(계21:1-6).

우리에게 일곱째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간 계획 안에 우리가 반드시 참여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계획해 놓으셨으니 그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리허설하라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우리를 천년왕국에서, 그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이며(안식일) 연이어서 영원한 안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들이시겠다(주일)는 하나님의 확신에 찬 열망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첫 언약을 통해서 이집트의 노예생활 가운데 샤밭을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시간을 회복해 주셨으며, 새 언약을 통해서 그 언약의 수혜자들인 전 열방의 이방인들에게로 확장, 적용되게 해주셨습니다.

첫째 부활과 함께 천년왕국에 참여한 성도들에게는 이미 영원이 시작됩니다. 샤밭이 먼저이고, 그 후에 주의 첫날(주일은 히브리어로는 ‘주의 첫날’이라는 의미로 ‘욤 리숀יוֹם ראשׁוֹן’이라고 합니다)이 이어집니다. 먼저 첫 하늘, 첫 땅, 처음 것들에서 샤밭을 누리고 그 후 새 하늘, 새 땅, 새 피조물로서 영원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샤밭은 샤밭으로서의 고유함이 있고 주일은 주일로서의 고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창조되었습니다. 천년왕국에서 부활한 우리가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안에는 영원과 새 창조에 속한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내 안에 영원과 새 창조에 속한 새 피조물이 하나님께 속한 새 생명으로 써 이미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도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창조에 속한 것이 이미 와 있도다.”

(고후5:17, 진리의 집 의역)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적 관계에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일 동안의 수고의 시간과 제7일의 안식의 시간을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6일과 제7일이 다르고 구별된다는 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리허설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이것 역시 시간의 분리와 구별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분리와 구별을 훈련하고 각 시간의 독특함을 지키며 그 특별한 목적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길이고 거룩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대대로 지킬 표징(오트אוֹת, 표시, 징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1:13, 31:17, 겔20:12,20).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출31:16)이었습니다. ‘샤브שׁב - 슈브שׁוּב - 돌아가다’라는 단어와 ‘타브ת – 언약, 표’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샤밭שָׁבת은 ‘언약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할례(브맅 밀라ברית מילה)가 몸에 나타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적 표시라면 안식일(샤밭)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샤밭은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적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증거이며 표시입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출31:13)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출31:16)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출31:17)

그래서 하나님은 출이집트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나이 산 아래서 십계명을 주시기 훨씬 전에, 홍해를 건너자마자 마라의 쓴 물에서 한 율례와 한 법도를 먼저 말씀해 놓으시며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때 부모 경외와 안식일을 처음으로 가르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면서도 안식일 전날에는 2배를 거두어 안식일을 준비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안식일을 훈련시키셨으며, 토라의 말씀과 예언서에서 언약의 기초가 되는 안식일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할 때 언제나 그들이 안식일을 더럽혔음을 언급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자 멸망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기억하고 그 날을 다른 날과는 구별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거룩한 삶의 안전한 기초이며 언약 안에 머무는 비결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구별한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시간의 주권자이시며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더욱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든 공급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뢰가 있기에 샤밭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더욱 깊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비뚤어져 있었던 것을 교정하고 사랑을 누리게 됩 니다.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겔20:12)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겔20:20)

하나님은 안식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표징이며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됨으로 연합되었다’는 신호이면서 언약의 기초가 된다는 뜻이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징입니다. 시간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담고 있는 샤밭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각자는 고유함과 독특함을 담고 있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샤밭을 지킴으로 지켜지고 또 샤밭은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샤밭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나의 안식일(시간)과 함께 내 성소(장소)를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19:30).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또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샤밭을 지키고 성소를 귀히 여기라 하심은 종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한 정한 시간에 약속하신 땅에서 살게 되는 거룩한 존재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וְיָדַעַתְּ כִּי־ אֲנִי יְהוָֽה

붸야다트 키 아니 아도나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진노하신 것은 그들이 조상의 가증한 일을 행한 것 때문이었습니다(겔20:2,8).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모든 신들을 친히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나오실 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을 거듭하시며 그들을 향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사랑을 부어주시면서 경계하고 경계하신 것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은 우상을 섬기지 말 것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 땅의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제의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셔서 데리고 나온 이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상들의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면서 준행하라고 말씀하신 율례와 규례를 저버린 것이었습니다(레19:37, 겔20:13). 그 율례와 규례의 핵심은 부모 공경과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의 출발인 부모를 업신여기고, 하나님과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더럽힘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그 외 하나님이 주신 거룩을 지키기 위한 법들이 무너져 버렸습니다(겔22:7-12). 부모 공경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함과 형제 사랑을 배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나그네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괴롭혔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성물을 더럽혔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제물 올려드리는 방법을 무시했으며, 우상숭배하는 제사들로 인한 온갖 음행을 받아들였습니다. 뇌물과 악한 이익으로 공의도 무너졌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이 모든 나라들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때, 그제서야 그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겔22:16). 이집트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이 높이 들린 손으로 심판을 행하실 때 우상 아래 있던 이방 나라들을 향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선포는 이스라엘의 거역과 불순종, 배신으로 인해 그들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방 나라를 향한 심판이 이스라엘을 향해 쏟아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셨던 분이 심판의 하나님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 큰 아량과 관대함, 인내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시며 폭풍같이 질주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악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쏟아부으시는 진노의 대접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향하기를 원치 않으시기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겔20:19-20)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율례과 규례를 사람이 준행하면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겔20:11).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신 율례와 규례의 핵심은 부모 공경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가는 삶의 기초가 됩니다.

거룩함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며 죽여야만 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란입니다. 영적인 음란과 육적인 음란은 모두 하나님이 가장 경계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거룩을 거듭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며, 서로에게 속하였다는 것은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거룩은 결혼의 하나됨을 지키는 핵심입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바라보고 아내가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 것은 거룩을 깨뜨리고 결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는 결혼의 언약을 깨뜨려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남편이 부족하고 아내가 부족하면 깨뜨려도 되며 죄가 되지 않는다고 법까지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음란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대는 것도 음란입니다. 거룩을 깨뜨리는 비결은 음란, 섞여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전략들이 이 세대에 풀어졌고 그것이 이 마지막 때에 성공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신부라는 정체성을 깨달은 자들은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가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기 위해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갑니다(마5:48). 거룩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예슈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 그것은 하나님의 신부들의 옷, 웨딩 드레스입니다. 거룩함으로 옷 입고 단장한 신부는 신랑이신 예슈아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