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st 에모르

אמר

말하라

파라샤 Leviticus (레) 21:1-24:23

하프타라 Ezekiel (겔) 44:15-31

브리트 하다샤 Luke (눅) 14:12-24 / Mathew (마) 26: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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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시간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6일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신 것은 인류 역사를 6,000년으로 정하시고 7,000년째로 들어가는 시간에 옛 창조에 속한 만물 안에서 전지구적 안식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의 계획을 7일에 담으심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7천년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모든 새 창조 세계 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라고 7일째 샤밭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이뤄가시는 일들을 볼 수 있도록 1년이라는 시간 안에 7절기를 담아 놓으심으로 인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성취되었고 성취될 것인지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절기, 모아딤מוֹעֲדים). 매달의 첫 날에 하나님 앞에 성회로 모이게 하심으로, 춘하추동의 날씨와 씨를 뿌리고 열매 맺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미리 선포하게 하심으로 한 달의 시간을 기대하게 하셨습니다(월삭, 로쉬 호데쉬ראשׁ חדֶשׁ).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킹덤,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시간 속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다시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절기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모에드מוֹעד 혹은 모아딤מוֹעֲדים입니다. 모에드מוֹעד는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의 만남이라는 단수형이고, 모아딤מוֹעֲדים은 모에드מוֹעד의 복수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절기는 우리가 인식해왔던 종교적 전통과 의식을 위해 특별히 치러지는 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해 놓으신 곳에서의 ‘약속된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약속된 시간들을 가르치실 때 이스라엘의 절기라는 말을 쓰지 않으셨고, ‘여호와의 절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2:14, 레23:2).

여호와의 절기들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간 사이클 안에서 이뤄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절기를 분명히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보이고, 또한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떤 시간 속에서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기를 통한 시간 사이클을 통해 우리는 지금 어느 때 즈음에 와 있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기를 통해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첫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절기를 아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킹덤이 이뤄지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온 열방을 향한 구속의 역사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며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기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두 번째 이유는 ‘리허설’입니다. 모든 인류 역사가 마쳐지고 완전한 구원이 최종 성취되면서 하나님의 킹덤으로 들어갈 때 그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을 우리로 하여금 미리 행하고 맛보게 하기 위해 정하신 약속된 시간이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날 우리는 그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면서 축제를 하며 리허설과 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리마인드’입니다. 매년 같은 시간의 사이클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지킬 뿐 아니라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다시 생각하며 감사와 기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절기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분주한 것들로 채우거나 게으르게 낭비하게 하거나 다른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거나 자기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시간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이것의 목적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대부분 어느 곳에 쓰이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으로 나의 존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와 내가 어떤 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의 존재로서가 아닌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샤밭과 월삭과 절기들의 시간으로 우리의 사이클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킹덤의 시간의 사이클로 바꾸는 것과 같고 영원을 땅에서 미리 살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토라에서 하나님은 샤밭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셨고 많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샤밭을 지키지 않을 때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시간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제한된 시간이 아닌 영원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영원으로 들어갈 것임을 일 년의 일곱 절기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구원하셔서 누룩 없는 삶을 살게 하시고(유월절, 초실절, 무교절), 우리의 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 성령과 연합되게 하시고(오멜카운트, 오순절), 택함 받은 자들을 불러 올리시고(나팔절), 예루살렘의 보좌로 돌아오시면서 아사셀(아자젤)에게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되돌리심으로 인류 안에 사탄의 영향력을 뿌리째 뽑아 제거하시며 희년을 적용해 주시고(대속죄일), 영원한 장막으로 들어갈 것(초막절)을 유월절부터 초막절에 이르는 절기의 시간에 담아두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들(모아딤מוֹעֲדים)에 성회로 모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거룩한 모임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입니다. 거룩한 모임, 성회는 미크라מִקרא입니다. 이것은 카라קרא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불러 모으다 convocation’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모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정한 시간에 초대하셨습니다. 대속죄일을 제외하고 모두 기쁜 축제와 잔치의 절기들입니다. 그러나 대속죄일에도 하루 동안 금식하며 엄숙하게 보내다가 하루의 해가 지면서 마무리되려 할 때 전국에서 뿔나팔이 크게 불리고(희년에는 희년이 선포되며) 예루살렘의 딸들은 미리 예비하고 대여한 흰 옷을 입고 예루살렘과 감람산의 언덕들로 나와 둥글게 돌면서 기쁘게 춤을 추며 이스라엘의 구속과 정화됨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을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이집트에서 구원하신(세상에서 구원하신) 유월절, 누룩을 제거하여 누룩 없는 삶을 사는(우리를 더럽게 하고 부풀게 했던 잘못된 것들) 무교절, 보리 추수의 첫 열매 한 단을 묶어드리는 부활의 첫 열매의 초실절, 밀 추수의 첫 열매를 드리는 이방인의 대추수 오순절, 나팔을 불어 공중으로 다 모이는 나팔절, 전쟁의 절정 중에도 민족적인 금식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만왕의 왕을 맞이하는 대속죄일, 초막에서 기쁨의 잔치를 누리는 초막절은 모두 하나님의 왕국이 어떠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절기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시간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반복, 성취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증거해주며, 또한 앞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주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들은 한번 일어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견할 수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준비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일정 주기가 있습니다. 7일, 7주, 7절기, 7년, 49년과 50년과 70이레, 열 번의 700년, 7천 년, 반복되는 작은 사이클을 통해 우리가 이전 시간에 지키지 못했던 것들, 놓쳤던 것들, 실수했던 것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 더 잘 준비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아직 메시아닉 킹덤이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통해 킹덤의 시간이 어떻게 이루어져 갈지 미리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절기는 우리가 앞으로 있게 될 그 날(시간)과 그 곳(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이 잔치(기쁨의 절기들)에 초대하는 주인의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업 때문에, 돈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초대를 거부합니다. 주인은 아무 곳이나 나가서 강권하여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은 그분의 초대에 응하는 것과 예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굳어 있고 종교의 영에 지배를 받으며 물질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 거룩한 초대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땅도, 소도, 결혼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그 작은 것 하나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더 아름답고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영원으로 초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누리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한시적인 삶에 매이지 말고 영원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가 고작 땅과 소입니다.

여호와의 절기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원을 누리는 잔치입니다. 모두 그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초대하신 잔치 자리는 우리를 괴롭게 하고 고민스럽게 하려고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영원을 누리는 잔치 자리에 더 많은 주의 백성들이 초대에 응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길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등잔불과 진설하는 떡–성령과 말씀

하나님 앞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소의 등잔불을 항상 켜 있게 할 것과 떡 12개가 진설대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규례이며 영원한 언약입니다(레24:3,8).

등잔불, 메노라는 캄캄한 성소 안의 유일한 빛입니다. 우리 속사람 안의 영을 밝혀 줄 수 있는 유일한 빛은 성령의 빛입니다. 이 빛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제사장은 2가지 일을 매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백성이 가져온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으로 매일 등잔대를 채워 빛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등잔대 위의 등잔불을 항상 정리하는 것입 니다(레24:4). 불타고 남은 심지를 청소해 주지 않으면 성소 안이 그을음으로 가득 차게 됩 니다. 타고 남은 재, 찌꺼기들, 우리의 마음 속에 매일 남게 되는 찌꺼기들을 살펴보고 청소 할 때 등잔대 위의 불이 깨끗하게 타오릅니다. 이 빛이 꺼지면 성소에는 어둠이 꽉 차게 됩니다. 하나님은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이스라엘 자손이 가져오게 하시고, 그 기름으로 등잔불을 켜고 재를 정리하는 일을 제사장에게 맡기십니다. 백성과 제사장이 함께 섬길 때 성소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비추는 등잔대의 빛이 꺼지지 않기 위해 매일 성령의 기름으로 채우고 매일 회개와 정결함을 위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삶이 곧 빛을 비추고, 정결하게 되는 삶입니다.

진설병은 떡 12개를 거룩한 상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한 유향을 떡 위에 둡니다(레24:5-7).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은 하나님이 모두를 기억하시고 모두에 게 말씀으로 먹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말씀이 떠나지 않도록 진설의 떡을 항상 올려두라고 하십니다. 먹을 음식이 없이는 우리의 육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이 말씀이 없이는 우리 영의 생명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생명은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예슈아입니다(요1:1). 그러므로 진설의 떡이 우리 삶에 항상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과 생명이신 예슈아를 붙들어야 합니다. 진설의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 파님לְְחם פָנִי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얼굴(임재)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립니다.

성소의 등잔대에 매일 성령의 신선한 기름을 채워 그 빛이 꺼지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말씀을 향하는 자는 자신을 지켜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성령의 빛이 매일 나를 비추고 나의 주변을 비추고 있기에 어둠과 부정함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얼굴과 그 말씀이 은혜와 평강 가운데 나의 삶을 붙들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킹덤에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나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섞이지 말고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생각과 말들은 하지 않겠다고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섞이면 다 더러워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원수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문으로 더러운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등잔대의 빛을 성령의 기름으로 항상 켜두고 진설의 말씀의 떡을 항상 내 안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많은 백성들을 주님과 영원한 사귐이 있는 잔치 자리에 초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신 이유는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제사장 역할의 회복과 그 영광을 이어받을 자들

에스겔 44:23-24에서 주님은 제사장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야라ירה),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야다ידע)하게 할 것이며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미쉬파트(משפט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토라תוֹרה)와 율례(후카חקה)를 지킬 것(샤마르שמר)이며 또 내 안식일(샤밭(שָׁבת을 거룩(카도쉬קדוֹשׁ)하게 하며...”

제사장이 가르쳐야(야라ירה) 할 것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 또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야다ידע)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서 분별이라는 단어는 야다라는 말로 쓰였는데 이것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하고 배워서 아는 것이고, 인식하는 것(perceive)이며, 어떤 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acknowledge)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킹덤의 규례와 말씀을 배워서 아는 자이고 이것을 삶으로 살아내어 체득하고 인식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옳은지 아는 자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규례대로(미쉬파트משפט) 재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는 모든 판결을 말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중심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거나 세상의 관점으로 한다면 온전한 재판을 행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은 오직 하늘의 입장만을 가져야 합니다.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은 성전의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제사장들의 역할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성전이 회복될 때 하나님은 레위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사독 자손이 수종을 들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겔44: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 사독의 자손들은 성소의 직분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독은 레위의 세 아들 중 고핫 자손의 후예입니다. 고핫 자손은 성막을 섬김에 있어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성소의 물건들을 몸으로 나르는 일을 감당했던 자손입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영역에 닿았던 사람들입니다. 고핫의 아들은 아므람이었고, 아므람은 아론과 모세를 낳았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고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로 그 장자권이 이어졌으며(나답과 아비후가 죽었기 때문에) 엘르아살의 아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잠재우게 한 비느하스였습니다. 바로 이 비느하스의 후예가 사독입니다. 사독은 다윗 왕을 끝까지 섬겼으며 아도니야가 반역할 때 그곳에 끼지 않았고 솔로몬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영원 한 제사장 가문의 언약을 주셨고 그 언약은 사독에게로 이어지며 지켜집니다. 비느하스에게 흐른 공의로운 영적 DNA가 끝까지 자손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독의 자손들을 향해 평가하시길 모두가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은 끝까지 성소의 직분을 지켰다고 하십니다.

반면 사무엘상의 엘리 제사장 가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엘리는 아들들을 잘 훈육하지 못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성소와 예물들을 경홀히 여기는 것을 방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가문가운데 태어날 자들은 젊어서 죽을 것이며 노인이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삼상2:32-33). 실제로 엘리 가문의 제사장들은 반역에 동참하거나(아비아달) 좋지 않은 일에 연관되어 직분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가문이었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끝까지 자신을 구별하고 하나님을 따르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생겼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섬기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따라가는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따라가는지에 따라 그리고 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수행하게 되는 영광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때에도 끝까지 그 말씀을 따르며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을 지키던 자들에게 맡겨질 것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