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th 코라흐

קרח

고라

파라샤 Numbers (민) 16:1-18:32

하프타라 1Samuel (삼상) 11:14-12:22

브리트 하다샤 Acts (행) 5:1-11 /Matthew (마) 26:13-24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침범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열 명의 정탐꾼이 불신이라는 전염병에 전염되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며 하나님을 향해 대반역을 일으켰던 이스라엘 회중의 광기가 사그라들고 진정되었지만 더 크고 위험한 반역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회중이 아닌 레위 지파의 지도자들과 지파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모세와 아론을 향해 대적하여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진영의 바깥 쪽에서부터 백성들의 궁시렁거리는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시작된 반역은 여러 번에 걸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고 그때마다 모세의 중보로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점점 진의 중심으로 들어와 성막 주변에 둘러서 진을 치고 머물던 레위인들에게까지 이르게 되어 이제는 그들을 중심으로 대반역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핫 자손은 레위인들 가운데서도 성소의 지성물을 담당하는 자들로 지성물을 직접 그 어깨에 메는 일을 하였기에 수레가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자신들의 어깨로 직접 운반하면서 그 거룩한 영광과 임재에 닿아 있었습니다. 고핫 자손 중에서도 고핫의 직계 손자였던 이스할의 아들 고라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 지파의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아들 온과 함께 당을 짓고 회중 가운데서 이름있고 영향력 있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회중 가운데서 이름있고 영향력 있는 지휘관 250명이 합세했다는 것은 거의 온 회중의 잠재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한 그들의 반역은 상당히 노골적이고 거칠었습니다. 고라(코라흐קרח)라는 이름은 ‘대머리’라는 일차적인 뜻과 함께 ‘단도직입적인, 노골적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고라와 반역자들은 아주 담대하게 모세와 아론을 향해 말합니다.

고라는 르우벤 자손들과 당을 지었습니다. ‘당을 짓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카흐는 ‘가져가다, 취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져가서 자기들 편으로 끌어모았습니다. 또한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 250명의 마음을 끌어모아서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세력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자기 세력을 키워서 크고 많아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상의 원리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또한 위치가 높은 곳에 있거나 중요한 직임이 주어질수록 사탄은 그 지도자에게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 갑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더 크고 많은 후속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정탐꾼들 중 열 명의 정탐꾼들도 지휘관들이었고 고라와 함께 당을 짓고 반역한 모든 사람들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탄은 그들 안에 숨어 있던 탐욕과 욕망을 자극하여 어둡고 부정적인 말들을 퍼뜨려서 하나님을 향한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높아지도록 충동질하여 선을 넘어서게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악한 목적과 의도는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어둠과 사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직임, 직분의 권한과 한계를 더욱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하려고 하는 순간 야망이 되고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침범하여 넘어가려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맡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것, 큰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또 나에게 그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때 지도자는 스스로 높아지지 않고 충성되고 겸손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권위에 대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경계는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의 침범은 그 경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하려는 마음과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결국 경계를 넘어 침범하게 합니다.

고라 자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분을 넘보았습니다. 고라 자손에게는 게르손 자손이나 므라리 자손보다 더 귀한 직임이 주어졌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거만해졌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임을 넘보았고 모세와 아론을 질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사탄적인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각각에게 맡겨지는 역할과 직임과 직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선택되며 맡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은 언제나 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선택과 결정을 신뢰해야 합니다.

큰 공동체나 작은 공동체는 크기와 역할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님의 눈에는 똑같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맡길 만한 자에게 맡기신 것이고 친히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크고 작음에 매달리며 크기와 수에 따라 귀하고 천한 것, 높고 낮은 것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법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13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교만할 때 자기 세력을 과도하게 키우려 하고 자기 위치를 스스로 더 높이려 하며 자기 뜻에 따라 더 큰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위태로운 경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에 충성하면서 내게 주신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면 하나님은 잘 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권위에 침범하는 것은 사탄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은 경계선을 넘어서서 침범하고 빼앗아 취하여 자기 왕국을 크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왕국을 만들려고 하는 자, 자기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자, 하나님의 영광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넘어서는 자는 내침을 당하고 쫓겨나게 되어 하나님의 킹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영역을 존중하고 보호해 주며 그것을 허락하고 맡기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질서이고, 권위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와 주권을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심판을 멈추게 한 중보와 예배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침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침범한 악함을 보인 자들을 향해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그 땅을 가르셔서 온 우주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자신들의 권위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워진 것임을 온 회중이 알게 하시길 요청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마치자마자 땅이 입을 열고 고라와 그에 속한 모든 것, 다단과 아비람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삼키고 그들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 모든 회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스스로를 높이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던 자들이 모두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심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여호와의 불이 나와 분향하고 있던 250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땅의 진동(지진)과 불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런 심판의 과정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 마음이 스올에 삼켜진 반역자들에게 있었던 회중은 다시 모세와 아론을 향해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고 원망했습니다(민16:41). 지독하리만큼 사그라들지 않는 반역의 기운을 심판하시고자 하나님은 회중 가운데 염병을 보내셨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습니다. 지진과 불의 심판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완악한 백성들에게 전염병의 심판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결정한 순간이 광야에서 4번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의 돌판인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황금 송아지를 향해 예배하고 있었고 그 순간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내가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10)”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약속의 땅 에덴-동산의 산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돌아오라고 정탐꾼을 보내셨는데 그들이 엉뚱하게 자기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되는 보고를 하며 하나님이 주신 땅에 대해 악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고라의 반역의 과정에서 2번이나 연이어집니다. 고라가 회중을 모아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는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민16:21)”고 말씀하십니다. 또 고라와 그 무리들의 심판을 보고도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그치지 않고 여전히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민16:45)”

길고도 지독한 반역의 과정이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한 순간에 멸망 당할 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4번이나 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운 것은 모세의 엎드림이었습니다. 엎드림은 나를 낮춤으로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엎드림은 하나님과 죄를 지은 백성 사이의 중재의 역할을 하는 예배와 중보의 자세입니다. 모든 것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몰라보는 방자한 백성들을 대신하여 구원을 호소하며 엎드리는 자세를 가진 그 한 사람을 통해 나라와 민족이 구원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라고 하며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들어 치려고 할 그 순간 구름이 순식간에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구름 기둥 안에서 내려오신 여호와께서 회막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두 사람이 엎드려 있는 중에 모세가 영적으로 감지합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전염병으로 순식간에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구나!” 모세는 함께 엎드려 있던 아론에게 말합니다. “향로를 취하고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아 그 위에 향을 피워서 급히 회중에게로 뛰어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아론이 신속하게 향로에 제단 숯불을 담고 향을 피워서 회중 안으로 달려들어가며 “당신의 자비와 긍휼이 이 백성을 향한 당신의 진노를 넘어서는 것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하소서”라고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리면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 전염병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여호와께서 노여움을 푸셨습니다.

이 심판의 과정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향로의 분향 중보기도는 전염병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속죄의 제사를 올려드리며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과 악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중보적인 예배를 올려드리고 엎드려 중보기도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이 멸망시키시려던 민족과 나라가 위기를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민족과 나라를 구하는 예배와 중보기도가 올려지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때입니다.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금향로에 제단 숯불을 담아 기도의 향을 올려드리며 급하게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뛰어들어가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구하던 아론의 모습과 회막 앞 여호와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마음을 돌이켰던 모세의 중보기도의 자세가 교회에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렬되는 레위인들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본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표징 앞에서 두려워하며 모세를 향하여 자신들이 죽게 되었음을 연달아 호소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민17:12)

더욱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성막에 가까이만 나아가도 그들이 죽게 될 것 즉,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던 레위 지파의 다수가 심판을 받았고 자신들의 반역하는 죄가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아닌 아론을 향해 직접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직무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를 시키면서 그들만 성막에 가까이 나아와 제사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민18:1).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의 죄와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담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은 성소와 예배를 올려드리는 제단을 섬기는 직분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것이 제사장의 첫 번째 임무입니다. 제사장은 회중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을 이어주는 중재자입니다. 중재자는 양쪽 모두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중재자로 세우셨고 그들이 이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의 형제들인 레위인들이 그들을 돕도록 하셨습니다(민18:2).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직무는 오직 성막 전체를 관리하는 일과 성소와 제단(예배)을 섬기는 제사장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워 백성들이 죄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오려고 하다가 죽지 않게 보호하셨고, 제사장에게는 같은 형제인 레위인들을 주셔서 함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제사장에게 허락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고(민18:6), 또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8:7). 하나님은 반역 사건 이후에도 12지파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직임을 여전히 레위 지파에게 맡기셨고, 제사장의 직분도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맡기시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레위 지파에게 이런 선물을 허락하셨을까요?

카이로 게니자와 쿰란 동굴에서도 발견된 유대 고대 문헌 가운데 하나인 12족장들의 유언은 야곱의 12아들들이 죽으면서 자신들의 후손들의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실수를 하게 될 것인지를 바라보면서 예언하고 당부한 책입니다. 이 책 중에 ‘아람어 레위의 유언’에 레위의 간절한 기도문이 담겨 있습니다. 레위는 자신의 후손들이 어떤 실수를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려드렸고, 그런 레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레위를 하늘 보좌로 직접 올리셔서 그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임명하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그 직분을 허락하시겠다고 언약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셨듯이 하나님은 레위와도 언약을 세우셨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레위의 후손들은 연약함과 실수 가운데서도 제사장 직분의 축복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인들과 제사장 직분이 그들에게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4-6)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것은 정말 귀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가져나가고, 이를 위해 자신을 늘 정결하게 살피는 일은 부담감이 있는 일입니다. 모든 영광에는 책임과 무게가 따르고 대가 지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가 지불을 통해서 누군가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면 너무 값지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일은 백성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백성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슈아를 통하여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메시아닉 킹덤에서 왕이신 예슈아를 섬기고 백성들을 섬겨야 할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우리 모두가 이 직분을 지금부터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로 준비되길 소망합니다.

숨겨져 있는 반역의 뿌리 – 인본주의

스탠스Stance는 ‘입장(立場)’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입장에 서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집니다. 서있는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대화가 합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고라와 반역자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했지만(민16:3) 모세와 아론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말했습니다(민16:9). 고라와 반역자들의 눈에 모세와 아론이 분수에 지나치다고 비쳐진 것은 사실 그들이 분수에 지나친 스탠스Stance,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교만한 스탠스에 서있었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이고 교만하다고 보인 것입니다. 거기에 회중을 핑계로 명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라와 반역자들은 회중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고 자신들의 반역을 합리화했지만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 주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인본주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스탠스에 서서 이야기하는 모세와 사람의 스탠스에 서서 이야기하는 고라와의 대화에서는 전혀 합일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 사이의 격돌이 일어날 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입장은 우리의 본성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언제든지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2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왕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람의 왕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보다 주변 민족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도 원하는 왕을 세우고 싶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요청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슬퍼하였고 노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삼상12:12)”고 말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우레와 비를 통해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했지만(삼상12:19) 사무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였으므로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삼상12:22)’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실 때 4번이나 그들을 멸하려 하셨지만 그때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 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중보했습니다. 한 사람의 중보가 수천 년 역사를 지켜가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슬퍼하면서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할 것을 서원합니다. 모세와 사무엘의 스탠스가 하나님 편에 서 있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는 중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중보는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하는 중보는 중보가 아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되는 선동의 도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중보는 우리의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스탠스에 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인본주의에 있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권능으로 이제 막 시작하게 된 초대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을 위한 작은 숨김과 속임이 큰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쉽게 속였고 또 계산과 의도를 가진 숨김과 이기심으로 자신들의 몫을 몰래 따로 챙겨 놓고 숨겼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몫을 챙긴 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성령님을 무시하는 일이었으며 사탄이 틈을 타서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헌금을 다 드리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의 의도에 숨겨져 있는 인본주의와 사탄적인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5:3)

그 당시 초대교회의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에 작은 어둠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베드로는 그들의 심중을 간파하고 단번에 그 어둠을 잘라내 버림으로 공동체에 사탄적인 것과 작은 속임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숨겨져 있는 의도와 교만, 대적은 인본주의적인 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죄와 거짓과 속임의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교만과 대적은 전염병과 같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연약했기 때문에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공격과 하나님의 스탠스가 아닌 사람의 스탠스에 서려는 교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를 공격하게 한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공격은 공동체 전체 권위 구조에 손상을 입히고 질서의 혼란과 방자함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공격을 받을 때, 그리고 반역자들이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속이려 할 때 그것을 하나님 자신을 향해서 한 것으로 인식하셨습니다. 모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격한 것이고, 교회를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도록 세우신 사람과 공동체를 하나님 자신으로 인식하신 것이 하나님의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적자(고라)와 속이는 자(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철저하게 다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사람 중심’ 이라는 말은 좋게 들리는 슬로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이 아니고 교회가 환영해야 할 슬로건이 아닙니다. 이렇게 듣기에 좋은 슬로건에는 숨은 아젠다가 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가장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가치를 가장 존엄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인본주의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사람을 세워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 내가 사람을 폐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사람을 세우시고 폐하시는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슈아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곧 오십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긍휼과 사랑 앞에 겸손히 다룸 받고 그분 앞에 날마다 엎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스탠스Stance,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가 진정한 중보자입니다.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