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th 발라크

בלק

발락

파라샤 Numbers (민) 22:2-25:9

하프타라 Micah (미) 5:7-6:8

브리트 하다샤 Romans (롬) 11:25-32 / Matthew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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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부귀 영화에 넘어간 선지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 앞에서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소식이 주변 나라들에 퍼졌고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잘 되는 것을 지켜보았던 요르단 동편의 나라 중 하나였던 모압 왕 발락은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민22:3).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 출신의 민족인 줄만 알았던 이스라엘은 그 수가 많았고 땅도 없는 민족이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들은 생각보다 너무 강한 민족이었음에 모압 왕 발락은 번민하게 됩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자기 나라의 자원을 모두 탕진할 수 있을만큼 중다함에 위협을 느끼고 동맹국인 미디안의 장로들과 함께 대책 마련에 나섭니다. 

모압이 미디안 장로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에 힘을 모으자고 하면서 그들이 주장한 명분은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민22:4)’라는 것이었습니다. 발락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경제적, 환경적인 큰 손해가 있을 것을 명분으로 하여 그들을 저주해야 한다고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압이 롯의 후손들이었기에 모세를 통해 모압 땅은 건들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발락은 그저 이 위협적인 존재인 이스라엘을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발락은 전쟁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을 알고 물리적인 세계를 주관하는 영의 세계의 힘을 빌려 이들을 파멸시킬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 전략의 핵심은 바로 선지자 발람이었습니다. 발람은 영의 세계의 힘을 빌려 쓰는 주술사로서 발람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발락은 믿었습니다(민22:6).

모압 왕 발락은 주술사 발람에게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를 방랑하는 이 희한한 민족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압과 미디안 두 나라의 높은 장로들이 복술의 예물(복채)을 가지고 찾아와서 발람을 높이며 부탁하니 발람은 어깨가 으쓱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 물어야 한다며 그들을 하루 유숙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발람은 축복과 저주의 주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저주를 위한 요청에 여호와께 먼저 물어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발람에게 하나님은 이들이 누구인지를 물으십니다(민22:9). 하나님은 발람이 하나님을 아는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정직하게 보고하는지 살펴보셨던 것 같습니다. 발람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한 민족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한다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발람의 설명에 하나님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답하십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 백성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

하나님은 그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명확하게 답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면 발람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자신의 축복과 저주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고 그저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고만 답합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민족이라 자기가 저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했지만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발람을 높여주며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뭔가 미련을 남겨 두었습니다.

발람의 첫 번째 거절에 역시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어 발람을 부귀영화로 설득합니다. 발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하루 더 유숙하게 함으로 그들의 제안에 무게를 실어줍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돈과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것과 그의 마음에는 이미 가고 싶은 것을 결정했고 하나님께 묻는 것은 형식적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가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בּל עָם이라는 이름은 블리בלִי(without)와 암עַם(백성)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 백성에게 속하지 않은 자(그 백성이 아닌 자)라는 뜻입니다. 즉, 발람은 주술사로서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는 능력이 주어진 자였고, 여호와께 물어야 한다는 그 세계의 질서도 알았으며, 영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특별한 기능적인 능력은 받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따라가고 싶어했습니다(민22:19).

발람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이 복술의 예물(복채)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하는 부탁을 들었을 때 저주하러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서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려는 생각 안에는 이미 그 마음의 어떤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우는 이미 마음이 유혹되어 겉으로 하는 말과 행위와 속으로 하는 마음과 생각이 다르게 되고 그러한 충돌과 갈등의 과정 가운데서 자기 기만으로 빠지게 됩니다. 발락의 신하들은 복술의 두툼한 예물을 보여주고(민22:7), 더 높은 귀족들을 많이 보내면서(민22:15)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해주겠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라(민22:17)’고 발람을 띄워줍니다. 발람은 ‘발락 왕의 궁궐을 내게 주고 그 궁궐에 은, 금 가득히 채워서 줄 지라도’라며 겉으로는 말했지만 속으로는 물질과 명예에 유혹되어 ‘그러나 이제 당신들에게 청하노니 당신들도 이 밤에 여기서 묵으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말하며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는 응답을 받았지만 또 들으려고 하고 더 들으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히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얻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15에서는 발람이 불의의 삯(복술의 두툼한 예물)을 사랑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민수기 22:32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을 그 마음에 탐욕과 숨은 아젠다가 있었던 패역한 길을 걷는 자라고 평가합니다. 패역함(야라트יַָָרַט)이란 ‘발생을 재촉하다. 촉진하다. 결국은 그렇게 가도록 몰고 가다’라는 동사로 ‘고집 세고 완고하여 결국은 비뚤어진 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 속에 숨은 아젠다와 탐욕을 본 여호와의 사자는 그 안에 어떤 driving force(몰고가는 힘)가 있는지 훤히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주면서(민22:15),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해주겠다’는 유혹은 명예욕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존경받고, 더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내가 높은 자들과 교제하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자랑하고 싶어하게 합니다. 내 안에 이미 유혹 받은 갈망이 있는 채 주님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일단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갈망은 당신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선지자는 추측과 가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돈과 부귀영화를 위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을 깨우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돕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며 높이는 경향이 있기에 선지자는 사람들의 칭찬에 쉽게 자기를 높이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선지자가 사람들의 칭찬과 반응에 자신의 마음을 두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자기의 세력을 만들어 사람을 조종하게 됩니다. 선지자는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대언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발람은 그 중심에 돈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마음의 탐욕을 아셨기에 그가 가도록 허락은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그를 죽이려 하셨지만 충성스러운 나귀가 그를 살려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길이 사악하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이미 들었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척하며 자기 자신을 따라간 발람을 여호와의 사자는 책망했지만 발람에게 하나님의 음성만 전할 것을 당부하며 그를 살려줍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큰 해가 될 것을 아셨음에도 그에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동행하실 뿐 아니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주신 것은 철회하지 않으십니다(롬11:29). 한 번 하신 언약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에노쉬אֱנוֹׁש(깨어지기 쉬운 존재)가 아니시고 아담אָדָם(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행하십니다(민23:19). 발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잘못 사용할 것을 아셨지만 언제나 정확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대로 주신 은사도 철회하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영원히 축복하시겠다고 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언약도 지키셨습니다. 놀랍도록 정확하시며 그분의 성품에 전혀 흠이 없게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롬11:33)

마지막 시대 마지막 세대가 겪게 될 음란과 우상숭배 그리고 거룩한 신부들의 세대

발람의 예언 이후 발락과 발람은 각자의 길로 헤어집니다. 이들의 계략이 완전히 실패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어둠의 힘을 통해 저주함으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이들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들이 사용한 다른 전략은 직접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압과 미디안의 여인들이 주도 세력이 되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는 데 성공합니다. 모압 여인들은 자기들의 신인 바알브올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남자들, 특히 지도자들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되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게 됩니다.

우상숭배의 음행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진영을 더럽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이 전략은 발람으로부터 나온 계략이었습니다(민31:16). 그는 잠시 잠깐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였지만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탐욕에 가득 차 발락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신부로 선택된 이스라엘을 망가뜨릴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부가 거룩하신 하나님 곁에 있을 수 없도록 음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음행 만한 배신은 없습니다. 이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상실입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하나님은 그들이 발람의 교훈을 따른 것 즉, 우상과 행음한 것을 크게 책망하십니다(계2: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대답해보아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미6:3-5)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하게 행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늘 한결같이 의롭게, 그리고 진실되게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외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함과(아쏱 미쉬파트עֲׂשוֹת מִִשְפָט) 인자를 사랑함과(아하밭 헤쎄드אֲהֲבַַת חֶֶסֶד)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겸손함이 (하쯔네아 레켙 임-엘로헤이카הַצְנֵעַַ לֶֶכֶת ִעִם־אֱלהֶיך) 아니냐(미6:8)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은 철저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차지하게 하신 가나안의 모든 땅에서 우상으로 행음하였을 때 발람을 통해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지켜주었는지, 어떻게 공의롭게 행해주었는지 기억하고 알라고 말씀하십니다(미6:5).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 가식적인 예배로 하나님을 향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 말고 미쉬파트מִִשְׁׁפָָט를 행함과 헤쎄드חֶסֶד를 사랑함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겸손함을 갖추라고 권합니다(미6:8). 하나님은 사랑하는 신부에게 신랑과의 바른 관계(쩨덱צֶדֶק) 안에서 바른 분별과 결정(미쉬파트מִשְׁׁפָָט)을 하며 신랑의 헤세드חֶסֶד를 즐겨하고 그분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겸손함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모르면서 불평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이미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제한된 단어들로 표현된 말씀을 가지고 더 깊이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기보다는 표면적 사실들을 개인적으로,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람과 발락의 모의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감싸고 축복하길 원하셨는지, 하물며 악한 주술사에게조차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을 강권적으로 부어 그 마음을 보여주셨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고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공의로, 품위 있게 행하시듯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면 그분의 마음과 계획을 더 선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믿음의 순종은 따라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 끊을 수 없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아8:6).

출이집트한 세대는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고, 이집트를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가 광야에서 훈련받으며 자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제 곧 마주할 약속의 땅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요단 동편의 싯딤에서 한 순간 음행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싯딤에서의 이 음행으로 인해 일어난 전염병으로 출이집트한 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다 죽게 됩니다.

남은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에덴-동산을 되찾고 회복하여 하나님의 킹덤을 그 땅에 세우리라는 것을 안 사탄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고 음행으로 더럽힙니다. 지금의 세대에게도 사탄은 똑같은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슈아가 재림하시도록 그분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대, 온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분을 중심으로 전 지구가 의와 공평으로 통치되는 천년왕국인 메시아닉 킹덤을 오게 할 거룩한 세대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우상숭배와 음행의 파도로 지금의 세대를 덮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지금의 이 마지막 세대를 지켜야 합니다. 비느하스와 같은 하나님이 가지신 거룩한 질투와 의분을 가지고 음행하게 하는 우상숭배를 이 세대로부터 끊어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세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의 거룩한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새겨주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요한일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5:21)

우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멀어지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권위 아래있던 우리의 정체성을 우상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게 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강등시키고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가 죄의 본성을 따라 자신을 우상숭배로 내어주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상숭배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일5:3).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요일5:5).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킴으로 서로 사랑하고 그 아들 예슈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그 권세를 사용하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이겠습니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너희가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고 언약을 맺으셨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음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발람의 불순종으로 그를 죽이실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살려 두신 이유는 이스라엘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점술을 쓰는 악한 예언자였지만 그의 입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선포하게 하신 이유 또한 그것이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발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주를 하려는 자의 입술을 통해서도 자신이 선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임을 똑똑히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기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그리스도가 보이기 때문에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습니다. 비록 거역과 불순종의 죄를 반복하며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 안에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고(붉은 암송아지, 그 반석, 놋뱀) 이스라엘은 넘치는 은혜를 받고 더욱 정결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크고 놀라운 일을 야곱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발람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민23:21-24). 발람은 구름 기둥 가운데 그들과 함께 계시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진영 중에 함께 계심을 바라보며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고백합니다(민24:5). 가깝지 않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약 1500년 후의 메시아의 초림과 약 3천 500년 후에 있게 될 메시아의 통치와 원수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계시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중에 터져 나옵니다(민24:17-19).

예슈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상태와 그들이 이후에 예슈아를 받아들이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설명하면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면 즉, 이방인 중에서 구원 안으로 들어오게 될 수가 가득 차게 되는 그 시점이 되면 온 이스라엘이 예슈아를 받아들이게 되고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반드시 교회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그들이 현재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인 우리들 때문에 복음의 원수가 된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아직도 유효하여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롬11:28)

복음의 원수인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상태로써 존재하며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더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상태라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예슈아를 믿지 않고 완고하게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고집 세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불신한다고 나무라듯이 이야기하지만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아 누리는 자가 되게 하려고 참감람나무의 일부가 꺾여져 나갔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 받게 되었음을 설명하며 이방인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원가지가 잘려 나간 이유는,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롬11:19, 진리의 집 직역)

지금은 우리 이방인의 구원 때문에 복음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지만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그들에게 유효하여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겨 주신 은사와 그들을 부르신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기한이 차면 그들도 구원 안으로 들어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6)

우리가 꺾여져 나간 원가지로 인해 접붙임 받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엡3:6). 접붙여진 생명은 신성한 생명에 연합된 생명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 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침례)받은 그 날,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약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원한 연합을 상징하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과정 안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포석을 깔아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מַה־ֹטֹבוּ ֹאהָלֶיךָ יַעֲקֹב מִשְכְֹנתֶיךָ ישְרָאֵל

마-토부 오할레이카 야아콥 미쉬케노테이카 이스라엘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민24:5)

출처: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Quoting from Reading the Torah Portion from the Hebrew Perspective in Jerusalem (Gen. Exod. Lev. Num. Deut.)